▲옛날에는 미쳐 몰랐던 「不快指數」 「騷音과 人體衛生」 등은 현대문명이 발견한 所産이다. 요즘의 시끄러움의 상징은 선거유세 혹은 시장터이지만 10여년전만 해도 우물가가 하나의 대표적인 것이 아니었을까? 왜냐면 동리 아낙네 셋만 모이면 한적한 시골, 들복판 우물가의 대화가 사랑방의 시아버님 귀에까지 들려 올 정도였다니까. ▲5년전까지만 해도 열교의 시조(始祖) 파문 당한자로 불리던 말틴 루터를 근년에 와서는 용서를 해주자, 파문을 해제하자고 하고 있다. 神을 배척한 샬뜨르가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은 제2차대전이 소용돌이를 치던 1943년. 그는 「存在와 無」로 실존주의 철학을 구축했고 「辨證法的 理性批判」으로 사회비판을 하면서 기반을 확립해갔다. ▲그는 맑스처럼 「휴마니즘」을 창도하는 방법으로 神을 疎外하고 인간에게 절대적 가치를 부여했다. 그러나 인간의 불안을 강조하고 敵對관계와 생존을 위한 투쟁 등을 例示하면서 恐怖를 설명했다. 샬뜨르는 인간사회를 약한자와 「부르죠아」층의 대립, 강압, 착취, 민주주의라는 위선, 특권층의 권위, 독선을 비평했다. ▲샬뜨르가 이야기한 不條理한 인생이나 利己 혹은 교만, 敵對행위는 仁祖가 벌써 자유의사로 저지른 것이다. 「창세기」는 아담을 돕기 마련인 아내 에와가 앞장서서(적극적으로) 남편을 죄로 유인(리드)했고 아담이 하느님의 문책을 받았을 때 스스로의 책임을 회피하고 오히려 그의 아내를 하느님께 고발하기에 이르렀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현대인도 매일 미사에서 「나」를 봉헌하고 쉴새없이 기도하는 크리스챤이면서도 神을 너무도 자주 잊고 인간적 판단을 하고 남을 곡해하고 인생의 한편만 보는 습성을 버리기가 쉬운 일은 아닌 모양이다. 어쩌면 인간이기에. ▲우리말 속담에 「잘되면 내 탓, 못되면 조상 탓」이란 말은 古今을 가리지 않는 교훈이다. 왜 샬뜨르나 맑스나 루터나 「신이 죽음」 신학자나 아니 모든 인간은 신을 능가하려 하고 책임을 지우고 자연과 질서를 역행할려 할까? 그들이 준(寄與) 것이라도 좋다. 「반성」이다. 고귀한 것이며 생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