季節과 함께 곳곳에서 結婚의 季節風이 불기 시작한다. 一男一女가 창조되면서부터 男女의 結合은 人間社會의 요람이 되어왔다. 家庭은 크게 보아서 國家의 縮圖이며 그 중요성으로 보아서는 人間의 幸·不幸의 근원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社會의 安定과 不安은 家庭의 安全과 不安에서 빚어지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國際的인 大戰爭도 家庭不和의 확대로 볼 수 있다는 社會學的인 結論을 놓고 볼 때 家庭의 비중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고 同時에 이런 家庭의 因子가 되는 結婚의 重大性은 더 以上 再論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더구나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있어서는 結婚은 더한층 높은 次元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結婚의 目的이 子女生成이라는 점으로 볼 때 結婚은 하나의 창조적인 槪念으로써 創造主의 不斷한 創造業의 계승이요 따라서 두 夫婦는 創造主의 협력자로서의 높은 使命感을 意識해야 한다.
또다른 結婚의 目的은 夫婦 相互協助, 여기에는 특별히 男女間 愛情의 極致를 이룬다는 점이다. 그러나 크리스챤적인 사랑은 두 夫婦의 「에로틱」한 사랑으로 終章을 맺는 것이 아니고 더 높은 절대자의 永遠한 사랑에로 비약하는데 있다. 따라서 結婚은 사랑의 「클라이막스」도 아니요 사랑의 結實도 아닌 「永遠한 사랑에로 가는 웨딩마-치」의 연속이란 점에서 가톨릭的인 결혼은 더 높은 價値觀을 지니고 있다.
이와같은 意義를 가진 結婚은 두 人格과 人格과의 엄숙한 人格的인 契約에 依해서 成立되는 것이므로 結婚은 그 自體가 不可解性1이요 一夫一妻라야 한다.
이러한 가톨릭的인 結婚觀은 어떠한 理由로서도 變質될 수 없다. 그래서 가톨릭은 上記의 結婚觀을 거부하는 非가톨릭인과의 결혼을 原則的으로 不許(勿論 條件附로 많이 허용은 하지마는) 한다.
社會秩序가 흐려지고 性倫理가 頹廢해 가는 오늘의 이 社會에 새로운 社會的인 革命이 必要하다면 그것은 다름아닌 家庭의 혁명이 아니겠는가? 家庭의 革命은 새 家庭을 꿈꾸는 新婚夫婦들의 結婚革命에서부터 始作되어야 한다. 얼마전 가정법원에서 발표한 통계에 依하면 昨年에 比해 今年의 離婚率은 벌써 24%의 상승률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어떤 理由를 不問하고 社會的인 「모랄」의 退步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대로 가다가는 이혼률의 상승은 걷잡을 수 없을 것이며 이것은 곧 우리의 社會的인 悲運을 예고하는 무서운 凶兆가 아니겠는가? 우리는 이러한 社會的인 問題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심각한 관심을 모아서 문제해결의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여기에는 韓國的인 社會與件에서 오는 여러가지 原因들이 介在하고 있을테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原因은 過去 韓國的인 大家族制度가 무너져 가면서 빚어지는 그 잔재와 새로이 밀려오는 歐洲의 思想이 뒤범벅이 되는 思想的 혼란에서 일어나는 거시알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젊은층은 溫故知新의 여유있는 건전한 思想을 갖지 못하고 外來思潮에 無批判的으로 乘하고저 하는 경향이 너무나 강하다. 오늘의 젊은층은 뚜렷한 結婚觀도 없는 듯하다. 無條件 旣成世代에 대한 反抗意識에만 사로잡힌 듯 하다.
이와같이 無秩序한 結還渦中에서 이들을 眞理와 사랑으로 부풀게 하는 「누룩」이 되어야 할 우리 크리스챤들마저 여기로 휨쓸리는 수가 있다. 本來의 結婚精神을 상실한 채 순간적인 官能에 눈이 어두워 信仰마저 포기하고 非法的인 결혼을 하는 가톨릭청년들이 많다는 것은 한심스런 일이다.
우선적으로 결혼당사자들의 자각이 필요하고 다음에는 敎會當局과 結婚에 直接 관여하는 父母들의 細心한 주의와 指導가 있어야 하겠다. 요지음 곳곳에서 결혼준비를 위한 「가나」講座의 선푼이 일고 있는 것은 敎會를 爲해서 뿐 아니라 一般社會를 爲해서도 극히 장려되어야 할 問題인 것 같다.
그리스도이 말씀은 世上의 소금이요 「누룩」이라고 表現된다. 結婚 「시즌」을 맞이해서 우리는 가톨릭의 結婚精神을 우리 스스로가 먼저 강력히 준수하면서 社會倫理再建에 이바지 해야 한다. 思想的인 過渡期에서 方向感覺을 잃고 있는 오늘의 젊은 층을 敎會는 傍觀하지 말아야 한다. 敎會는 우선적으로 倫理革命의 先驅者로서 사랑과 正義의 「누룩」을 뿌리는데 果敢해야 하고 조직적이어야 하고, 계획적이어야 한다. 언젠가는 性의 悖倫兒들이 敎會에 挑戰해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