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생물학적 발생사를 들춰보면 사람은 20億年쯤 전에 單細胞 생물로부터 향상되어서 오늘에 이르렀는데 그 과정으론 紀元전 14億5千萬년경에 魚類가 되어 그때부터 有情物이 되었고 4億5千萬년경에는 _類가 되어 그 情을 새끼에게 미치게 되었으며 百萬년경 인류가 되고 나서야 그 情을 他에게나 全體에까지 미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魚介, 금수와 우리 人類가 구별되는 점이 무엇인고 하니 情을 他에게나 全體에 미친다는 바로 그것이다.
얘기는 비약하지만 젊은 문학도 S군에게서 이런 고백을 드른 일이 있다.
『그는 한장에 4·50원짜리 번역원고료로서 살아가고 있어 이것을 늘 비침하게 생각해 왔었는데 근자에 사숙을 서울시내서 永登浦로 옮기고는 매일 아침을 싸구려 해장국집에서 먹게되어 거기서 만나는 지개꾼이 짐하나 얻어걸리기에 얼마나 고심 참담한가를 알고 나서는 자기의 문필생활이 그대로 호사스럽고 다행한 것으로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번역고료 50원짜리를 메꿀 때 비참함을 느끼고 이것에 불만을 품었던 것도 그 요지게꾼 생활에다 이를 비기고 다행하게 생각한 것도 그다. 이렇듯 바로 그 한 사람이지만 남과 전체에 대한 인식이 없을 때의 그와 인식이 있을 때의 그는 判異하다.
즉 類觀念이 없는 자기 인식이란 閉塞된 충동적 본능적 자아만이 남는다. 사람이 본능만의 포로가 될 때 사물과 가치판단의 눈은 먼다. 『남의 염병 (傳染病)이 자기 고뿔(感氣)만 못하다』는 것은 이런 식의 思考다. 남이나 전체에 눈먼 자에게 사방은 암흑의 벽이요, 세상은 고독의 수렁일 수 밖에 없다. 또한 그런 盲目의 自我가 홀로 아무리 행복하려 해도 결코 행복할 수가 없다. 이래서 불안에 떨고 절망하게 된다.
인간이 인간이기 위하여 가장 요긴한 것이 곧 남과 全體에 대한 인식이다. 우리는 흔이 『나혼자라면 벌써 죽었겠다』는 말을 듣는데 이 말은 삶의 핑계라기 보다 더 인간의 본질에 합당한 말이다.
現代는 實存의 시대라고 한다. 또 인간의 실존감정은 고절한 것이요 누가 침범할 수도 침범될 수도 없는 것이라고 한다. 물론 누가 어떤 開我나 그 감정의 實在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時空 속에 아무 <類綠> 없이 어떤 個我나 감정이 성립되고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여기에 類觀念의 確立이 現代精神에 있어 第一義的으로 요청되는 바다. 또한 그리스도교의 隣人愛도 여기서부터 成立된다.
▲追記=글머리에 生物學的인 事例는 進化論을 追從함은 아니다. - 筆者
具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