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서는 11日부터 18日까지 第3次 세계평신자대회가 개최되고 있는데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전세계에서 2천여명의 대표들이 참가하는 이 대회에서 「人生行路에 있어서의 천주의 백성」이라는 主題下에 「오늘의 人間像」과 「교회쇄신에 있어서의 平信者의 位置와 所任」을 연구할 것이다. 이런 대회는 이미 1950년부터 구체화 되어서 1951년과 1957년에 대화가 있었으나 이번 제3次大會는 공의회 이후 처음 개최되고 공의회가 가르치는 교회의 각 분야에 궁한 쇄신사업에 있어서 평신자의 임무가 실로 막중하기 때문에 이번대회의 의의도 사뭇 큰 다가 있다.
이미 각 분야의 전문가들의 협찬을 얻어서 지역 대회 등을 통하여 준비한 이 대회의 다대한 성과가 기대되는 만큼, 이 기회에 그런 훌륭한 성과를 적용하기 위한 포식으로써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평신도 사도직의 자세에 대하여 반성해봄디 좋으리라 생각된다. 평신도 사도직이란 개념조차도 우리에게는 비교적 近年의 수입품이고, 구라파와 같이 신학적 고찰과 실제의 경험을 통하여 성숙한 것이 아니라 선진국의 형태나 조직을 뫙하여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중이다
공의회가 요구하는 교회쇄신은 먼저 우리 각자의 신앙생활의 改革과 深化에 있고, 다음으로 교회조직과 활동의 現代化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칫하면 우리는 後者에 치중하고 前者를 무심히 흘려버리는 경향을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평신도 사도직 부냥에 있어서, 그 조직이나 활동방법이나 환경에 대하여는 상당한 관심을 쏟으면서도, 평신자의 기본적인 자세문제에는 괄목할 만한 연구나 개선이 보이지 않는 실정이다. 실용주의적 사고방식에 젖은 현재인은 무엇을 어떠게 할 것인가를 열심히 모색하면서도 나는 누구인가, 나의 있음의 법칙은 무엇인가에는 무관심하다.
달리 말해서 우리는 평신자의 行爲論에 치중하고 그 存在論에 대해서는 등한하다는 말이다.
공의회 이후로 우리는 흔히 모든 신자가 바로 교회이다. 평신도는 被保護者이거나 제2급 신자가 아니라 고유한 책임과 人格을 가진 成人이다 云云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본 命題는 아직 소화되어 있지 않다.
평신도의 위치나 사명에 대하여 두가지 빛나간 견해를 들 수 있다.
그 하나는 보수적인 성직자나 평신자들간에 상직이 되어있는 平信者從屬論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평신자는 성직자도 아니고 수도자도 아닌 보통 교우로서 성직자의 지도에 순종하고 교회 유지비를 부담하고 묵묵히 착한 표양으로 전교하는 사람이라 한다. 그들의 사도직을 보필하는 것이라서, 쉽게 말하면 성직자의 手足 노릇을 잘 하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모든 사도직의 이상은 성직자가 설정하고, 계획과 지휘와 감독은 성직자의 차지요, 평신도는 순명과 열성의 미덕을 발휘하여 시키는대로 잘 움직이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곧잘 『우리가 뭐 압니까, 신부님이 명령만 하십시요』하는 순박하면서 동시에 무책임한 대답을 한다.
또하나 정반대의 견해는 자칭 진보주의자들의 平信徒解放論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평신도도 당당히 영세, 견진한 그리스도의 증인이요 성직자의종속자가 아니기 때문에, 모든 사도직 활동에 있어서 성직자의 간섭을 배제하고 독자적인 노선과 방법을 추구하는 自足的인 운동체로 행세하려 한다. 공의회가 평신도의 정당한 지위와 직능을 찬양 고무한 것을 확대해석하여, 과거에 교회내의 평신사도직이 언제나 성직자의 專撗에서 시종하였던 것처럼 매도하고, 평신자의 자각과 책임감의 결여가 전적으로 성직자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으로 몰아 붙여서 은연중에 反聖職主義的 생각과 행동을 하게된다. 이런 경향은 우리나라에서 큰 세력은 아니지마는 一部 성직자들의 質的인 不足과 아울러 一部 「인텔리」 중에 散見되는 현상이다.
우리는 이 중요한 時点에서 正道를 파악함이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성직자나 평신자는 하나이신 그리스도의 신비체의 지체이기 때문에 기본적인 크리스챤의 지위 즉 하느님의 백성이요 천주의 義子라는 身分은 同一한 것이다. 성직자와 평신자의 구별은 身分的區分이 아니라 職分的區分이다. 흔히들 이것을 혼동하여 성직자는 교회안에서 신분상 언제나 上位에 군림하고 평신자는 언제나 下位에 侍立하고 있는 것으로 착학하기 때문에 성직자와 평신자 사이에는 主從關係가 아니면 묘한 對立感을 느낀다.
그러나 성직자나 평신자는 각기 하느님께로부터 특수하고 고유한 召命을 받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신비체를 건설함에 있어서 相互補足的인 사명을 띄고 있는 것이지 결코 종속론이나 해방론의 여지는 없는 것이다.
평신자는 성직자도 수도자도 아닌 者라는 소극적인 定義를 지워버리고 평신자는 세속 안에서 현세적 가치를 開發하면서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예언직과 왕직을 자기직능을 통하여 구현시키는자(교회헌장 4장) 임을 인식해야 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평신자의 창의성과 表現의 自由가 성직자의 鼓舞的 指導와 조화되어서 참된 사도직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성직자들은 좀더 평신자들의 격의없는 비판의 소리를 용납하고, 평신자들을 對等한 人格으로 맞아들여서 對話의 길을 넓게 개방하여야 될 것이다. 그리고 평신자 일반과 특히 적극적으로 사도직에 헌신하려는 지도적 신자들은 무익한 탄식과 비생산적인 불평을 지양하고, 적극적으로 대화의 길을 모색할 것이요, 평신도 사도직에 관하여 언제까지나 성직자들의 先導를 기다리지 말고, 스스로 연구하고 발견하여 능동적으로 사도직을 수행하는데까지 自己向上의 努力이 필요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