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뜰에 감이 익어간다. 동산에 밤송이가 입을 벌린다. 설명할 것도 없이 계쩔이 갖다주는 자연의 造化다.
어스름 달밤에 장독대 둘레에 핀 채송화꽃들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막내딸의 「부롯지」 만큼씩한 죄그만 나비들이 살랑살랑 날으고 있다. 저 미물같은 것들이 밤새 花粉을 나른다. 생각을 하면 눈물겹기까지 하다. 더우기나 저 노랑 · 분홍 · 자주 · 보라 등 꽃들이 저렇듯 색색으로 물들기까지는 여러 천년의 저 같은 役事가 거듭되었을 것에 생각이 미치면 驚異와 더불어 아득한 느낌이 든다.
우리는 흔히 이스라엘 시대에 예수가 나서 친히 행하신 기적에 흥미르 갖고 부러워 한다. 또 오늘날에도 자기 자신이나 자기 주변에 초자연적인 기적이 일어나 이를 체험하고 목격하기를 바란다. 그렇지는 않더라도 不意의 행운이 不時에 찾아들기를 바란다. 이것은 인간의 常情이어서 나무랄 것은 못된다. 그러나 한편 곰곰히 생각하면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르는 이 민물의 현상 속에서 우리가 당연하듯이 보아 넘기는 생물의 번영 속에서 초자연적인 힘과 配慮와 사랑을 발견해 내지 못할 것인가! 그야 無神論者는 이 자연의 奧妙를 靑山도 절로 綠水도 절로 자기의 삶도 「제절로」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지극히 적어도 우리 信仰者들에게 있어서야 여기서 신의 숨결과 손길과 사랑 즉 完美한 섭리를 못느끼고 못생각하고 못찾아낸다면 그것은 영혼의 장님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마치 저 예수시대의 예수의 가르침과 예수의 異蹟을 보고도 밎이 않을 뿐 아니라 예수를 오히려 거스린 유데아인들이나 이스라엘 백성들과 무엇이 다르라고 反問하면 나의 과장일까?
얘기는 조금 비약하지만 작은 꽃송이의 데레사 성녀는 각 인간에게 대한 천주 섭리의 오묘함을 다음과 같이 비유한다.
여기 기억을 따라 줄거리만 적으면 『만일 두 아버지가 있어 한 분은 자기 아해가 뜰에서 놀다가 돌에 부딛쳐 상처가 나면 이를 얼른 안아다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아서 치료해 주는 이와 또 한 분은 어린애가 다칠가봐 먼저 길의 여러 상황을 살펴서 돌같은 것은 앞질러 치워 그 어린애가 다치지 않게끔 미리 예방해 주는 이와 어떤 아버지가 더 현명하고 고마운 분이냐?
물론 둘째번 돌을 미리 치워논 아버지가 더 고마운 분임에 틀림없으나 사람은 보통 이런 깊은 은혜를 모르고 상처에 약을 바르고 낫게한 얕은 은혜에만 감사한다.』고 말씀하신다.
데레사 성녀 다운 말씀이다. 우리는 저러한 신의 豫防聖寵이나 그 庇護엔 눈 어둡고 호박덩이같이 금시 국이라도 끓여 먹을 福을 천주께 내라고 졸라대고, 또 바라는 것이다.
나와 우리집 식구는 아무 橫材도 變故도 없는 이 가을을 맞고 또 보내고 있다. 어쩌면 無聊할 정도다. 저러한 기적보다도 확연하고 무한한 성총속에서 말이다.
具常(詩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