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잇살이나 먹은 사람이 왜 그리 주책이냐?』 늘 듣는 소리다. 체세와 나이와 행동이 균형이 잡히지 않을 때 후려갈기는 소리다. 적은 「컵」에 아무리 물을 부어도 「컵」의 용량대로 담길 뿐이다. 공자님의 말씀을 뒤져보자. 그 나이에, 그 지혜, 그 행동일 수 밖에 없다는 말씀이 생각난다.
인생 20대는 계색(戒色)하고 30대는 (械鬪)라고 하셨다. 들이받기가 일쑤고 건뜻하면 시비조로 덤비고 반항을 일삼는 시절이라는 뜻이렸다. 40대는 불혹(不惑)이라니 좀처럼 남의 꼬임수에 넘어가지 않고 심부동(心不動)이라, 마음이 이랬다 저랬다 하지 않는 때를 선 그으신 말씀이 아니고 무엇이냐? 50에는 이순(耳順)이라는데 인격이 제자리에 위치를 딱 정하고 별별 귀거슬리는 일, 성가신 일, 욕되는 소리, 억울한 일을 만나도 능히 너털웃음으로 웃어넘길 수 있는 아량을 가질 수 있단 말씀일게다. 그런데 50대는 뭐라고 하셨나? 50에 지천명(知天命)이라. 능히 하느님의 뜻을 알기 시작한다는 말씀에 틀림이 없다. 천주님의 뜻이 무엇인가? 인간의 요사스런 뜻이 무엇인가? 잔꾀와 굵은 꾀가 무엇인가를 훤히 내다볼 수 있다는 그 시절이라는 뜻일게다. 게다가 70엔 뭐라고 하셨나? 인생 70에 종심소욕(從心所欲)에 불유규구(不諭規矩)라고 하셨다. 이것은 마음은 간사하여 욕심부리는대로 따라갈 수 있지만 추호도 양심의 가책없이 일과언 등을 하는 나이라는 말씀, 다시 말해서 뚜렷한 인생으로서의 두드려진 특표 · 좌표가 서있게 되는 시절이란 말씀에 틀림없으리라. 필자가 20대, 30대, 40대, 50대에 판단하고 행한 일에 60대에서 내려다 볼 때 자꾸만 웃음기만 하다. 나 스스로 자책을 하고 나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송아지도 나이를 먹어야 논밭을 갈고 고양이도 먹을대로 나이를 먹어야 큰쥐를 잡게 마련이다. 필자가 대전 재직시 창고에 어린 고양이를 넣어두었더니 말만한 쥐들에게 잡혀 「치명」을 한 일이 지금도 문득 생각이 난다. 그렇다고 나이 젊은 세개를 악평하는 것은 아니다. 자는 언제나 「젊은 늙은이」로 살아가기를 인생목표로 세우고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살아가련다. 젊었어도 늙은이같이 하고 늙었어도 젊은이같이 살아야겠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아래위로 「아가페」의 잔체를 벌려보련다.
吳基先(서울 大方洞본당 주임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