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를 맺고 꽃이 피는 시절이 지나가면 잎이 떨어지는 계절이 오듯 우리의 인간살이가 그러하다. 우리가 원하던 원치 아니하던 계절은 어김없이 찾아오듯 우리의 여로(旅路)는 무덤을 향하여 가고있다. 봄의 약속과 여름의 익은 과일이 지나가면 이렇게 언제나 허탈과 퇴색한 환각(幻覺)과 꺾어진 행복의 시절이 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비관주의자일까? 인생은 행복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낙천가는 없을 것이다. 죄와 빈곤과 증오와 죽음 등 지나간 한해의 경험이 그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세계의 문학에는 웃음보다도 눈물이 더 많이 표현되고 있다. 오직 예수만이 낙천과 비관의 피안에 서서 가을을 보르는 봄을 보이면서 인간의 비애를 없애고저 했다. 언젠가 하루는 틀림없이 솔직하게 끝없이 갈망하는 이 행복의 망향(望鄕)이 우리에게 울 것이다. 『인간은 천국을 생각하는 떨어진 신(神)이라』고 누가 말했다. 이렇게 모든 성인의 축일은 우리가 이세상에서 가져보지 못한 행복을 저세상에 던져보는 날이다. 모든 죽은이의 축일도 또한 생명의 축일이다.
우리가 가져보지 못한 생명을 희망하고 꺾어진 생명을 재생시켜야 할 생명의 축일이다. 이 두가지 축일은 다만 돌아오지 않는 여정(旅程)에 오른 사람들을 추상하는 날인가? 그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희망의 축일이다. 그것은 파산(破産)을 모르고 꿈에 살게하고 이 세상이 꺼버린 것처럼 보이는 사랑의 불꽃을 유지하는 구원(久遠)의 희망의 축일이다. 인류가 재발견하기로 꿈꾸는 낙원, 새로운 「예루살렘」인 천국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것은 종이 한장의 차이다. 신자의 죽음은 이 종이를 찢는 것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닏. 이 그리스도교적 희망을 실현하는 자는 겸손한 자, 가난한자, 어린이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듣는 자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으로부터 가장 많이 탈피된 자, 가장 많이 우롱된 자, 세상의 피(血)를 받은 자가 모든 나라, 모든 언어, 모든 종족의 구원된 한없는 무리가운데 첫째자리를 차지하는 자이다. 이 한없는 무리는 고양의 어좌앞에 서서 평화와 광명과 최고의 조화의 「비죤」인 구원(救援)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이 행복을 성 아우구스띠노는 『우리는 보면서, 사랑하면서 노래할 것이다. 끝없이』라 표현했다. 이런 것이 내일을 위한 우리의 희망이요 그것이 오늘의 성인들의 행복이다. 이러한 행복을 얻으려면 그리스도를 위한 사랑에서 이 세속정신에 젖지 않으면 된다. 그런자들은 우매한자들의 눈에는 죽은자 같이 보일지라도 그들은 실상 평화 속에 사는 자들이다.
지금은 한창 가을이라 모든 성인의 축일과 모든 죽은이의 축일은 가을의 축일이다. 농부는 추수후에 이듬해의 봄을 기다린ㄷ. 생명의 경사(傾斜) 길에 있는 우리 신자에게 언젠가 반드시 봄이 올 것이다. 묘지로 가는 길에 밟히는 낙엽들, 서산에 기울어진 태양은, 새로운 푸른 나무 그리고 무한한 태양이신 분을 향해 우리가 초대됐다는 상징이 아닌가? 「묵시록」에서 사도 요한은 『아무도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무리를』 보았다고 한다. 여기 또한 희망이 비친다. 이 무리는 날로 증가할 것이다. 이 무리는 사방에서 온다. 그들 가운데는 인생의 길에 몬지에 지나지 않았던 의인들이 있다. 이 영혼들은 가장 긴요한 것을 위해 궁지를 벗어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들은 모든 것을 지불했다. 노력과 그 결과 더럽혀진 자는 아무도 그 깨끗한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이것은 논리적인 일이다. 누가 길을 가다가 어떤 이유로 아름다운 옷이 더럽혀졌다면 여기 토론의 여유가 없다. 그러한 옷차림으로 아버지 집에 나타날 수 없는 것이다.
세탁을 먼저 해야한다. 우리 영혼을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다위가 뉘우치는 극적인 성시 50편을 읽어보라. 『내 죄 항상 주 앞에 있아오니…내 죄의 더러움을 씻어주소서』 그는 벌써 지상에서 그렇게 읊었다.
더욱 하느님 앞에 있어서랴. 이 영혼 가운데는 기도로써, 미사로써 그들을 도와주는 열심한 가정에 속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영혼이 만일 어머니인 교회가 이 한없는 잊어버린 가정을 위해 특별미사를 올려주지 않으면 비참한 망각의 구렁텅이 속에 신음할 것인가? 이 영혼들은 오늘 지상의 자비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성인들은 모든 간선된 자들의 축일이다. 이 아름다운 영혼들은 내적 외적 유혹에도 불구하고 성화된 자들이다. 그러나 모든 죽은이의 날을 기념함에 있어 그들은 유죄하다기 볻다 더 불행한 자도 있을 것이다. 악한 유전과 괴로운 환경으로 범죄하였으나 전적으로 책임이 없는 자들이다. 이 모든 이에게 축원을 보내자. 이 두 날은 모든 이의 축일이기 때문읻. 영성에 있어 아주 용감한 자들의 축일이다. 그러나 그들도 인간사의 소란 가운데 있고 또 때로는 피곤을 느끼고 속기도 하지만 하늘 평화와 행복이 깃들이는 위대한 하늘을 쳐다보며 꿈꾸는 우리를 잊어버리지 아니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