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혼배의 「씨즌」이기도 하다. 우리 성당에서는 어느곳보다도 혼배성사가 경건하고 엄숙하게 거행된다. 미신자들은 흔히 가톨릭의 혼배예식과 장례식이 훌륭해서 종교를 가지면 천주교를 선택하겠다는 소리들을 한다. 그들이 성당에 오고 천주교를 접하는 것이 대강 이런 기회만이기 때문이리라. 또 이것은 우리 가톨릭인들의 자랑이기도 하다.
그런데 내가 쓰려는 것은 혼배성사의 그 意義나 가치를 설명하려 함은 아니다. 그것은 혼배하려는 젊은 남녀 교우도 다 잘 알고 있고 각 주례신부로부터 충분한 말씀이 계실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의 엄숙한 예절 속에는 없는 축사같은 것을 한마디 자청해서(?) 해 볼 참이다. 에헴!
저 중국의 現存하는 碩學인 吳經態 박사는 그의 명저 『東西의 彼岸(金益鎭 譯)』의 한 대목에서 다음과 같은 유쾌한 述懷를 한다. 그 줄거리만을 적으면
『자기는 열두살엔가 일찍 결혼을 했는데 중매결혼으로서 말하자면 신부의 선을 보지도 않고 장가를 갔다. 이런 그를 西洋의 학자 친구들이나 신부들이 무슨 큰 신기스런 일인듯 묻고 놀린다. 즉 「당신은 안해를 보지도 않고 얻었다지요」하고 말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反問한다. 「그러면 당신은 부모나 형제를 당신의 다음대로 선택하였읍니까?」』라고.
어찌보면 폭소를 자아낼 한 마디 농담에 불과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잘 새겨 들으면 인간이나 兩性의 결합이란 이렇듯 그 근원에 초자연적인 섭리가 움지기고 있음을 인식시키는 큰 교훈이다. 실상 절대적으로 자기들이 자기의 자유의사대로 선택했다는 소위 연애결혼도 따지고 보면 그 동기의 우연을(일반적인 의미에서) 부인치 못하리라. 이런 근본적인 혼배의 인식에다 또 하나 결혼생활의 기술로서 소개할 것이 있다.
즉 성 바오로 서간에는 결혼생활에 대한 여러번의 충고가 있는데 그중의 걸작은 『부부는 서로 빚진듯이 대하라』는 귀절이 있다. 바오로의 이 말씀은 서로의 육체에 대한 요구에 거부할 수 없다는 결혼행위의 의무를 직접적으로 표현한 어귀지만 오히려 더 정신적인 부면에 함축성을 갖는다.
한마디로 말해 채무자가 채권자를 대하듯 한다면 남편은 아내에게 暴君 노릇은 안할 것이고 아내 역시 바가지 긁는 것은 삼갈 것이다. 우리도 예로부터 夫婦道에 서로 손님처럼 대하라던가 하는 교훈은 없지 않으나 그러나 저 성 바오로의 말씀같이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표현은 속담에도 없다. 저 失笑할 표현은 나이가 들수록 씹을수록 맛이난다. 소위 現代詩人이란 자가 케케묵은 얘기를 꺼낸다고 오늘의 신랑 신부는 一笑에 붙여도 좋다. 그러나 잠간 사이에 나의 말이 절실할 때가 온다. 에헴!
具常(詩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