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의 想念 속엔 으례 장마가 뒤따른다. 거기엔 이슬 맺힌 초가지붕 아래로 푸른 연기가 오르고 무섭게 젖은 토담 밑엔 옥수수 잎이 서글데는 장마철 시골의 저녁풍경이 떠오른다. 빌당의 창밖 희부옇게 멀어져가는 거리의 경적들, 물보래이는 아스팔트 위로 그림자처럼 떠가고 떠오는 박쥐우산. 도시나 시골이나 장마는 지겹고 불쾌지수는 상승하지만 그런데로 거기엔 여름의 운치가 깃들어 있다. ▲文學少女쯤 자처하려면 누구나 알만한 詩 「거리에 내리듯」이라는 베르레느의 여름비를 노래한 詩가 있다. 『거리에 비내리 듯 내 가슴에 눈물 흐르네. 내 가슴에 스며드는 이 시름은 무엇일까… 시들은 가슴에도 하염없이 솟는 눈물, 한조차 없건만 이 슬픔 까닭을 모르겠네』 왜 까닭이 없으랴만 그 까닭을 구체적으로 현실화할 때 그것은 오히려 웃읍도록 凡俗한 人間事로 전락하는 것이 아닐까. 말하자면 失戀을 했다든가 누구에게 오늘 냉대를 받았다던가. ▲詩人은 엉뚱시리 어떤 절박한 현실과 허잘것 없는 현실을 가지고도 그것을 詩化했을때 그것은 현실자체 아닌 아름다운 정서적인 현실로 둔갑시킨다. 따라서 詩人은 막연한 관념적인 슬픔도 현실의 구체적인 슬픔도 다같이 현실로 절감할 수밖에 없다. ▲강이란 강은 백사장으로 화하고 들과 산은 한결같이 적갈색이다. 농민들이 허우단심 파놓은 水路는 지렁이 자국처럼 긁혀있고 드디어 농부는 발광하고 활복자살을 하기에 이른 것이 현 호남지방의 한해 현상이다. 이런 통절한 현실을 일찍부터 한국詩人이 읊고 있다. 『비!비!비!비!비 우러러 목이 쟁기적새, 돌아보아야 무잿불을 올릴 풀한포기 없고 青銅화로가 이글대는 모래밭에 소피를 뿌려 쇠도록 징을 울린다. 이 실낱같은 사연 九天에 서리오면 비릿내(銀河水)의 봇물을 트옵소서』(李東柱作祈雨祭) ▲이즘 교회가 누누히 부르짓는 것이 「현실참여」인데 당면한 현실인 한발에 대한 구호대책이나 구체적인 실행은 과문한 탓인지 듣지 못했다. 일간신문의 한발 一色의 보도에 비해 교회신문은 어느 별천지의 소식만을 전하는 느낌. ▲비안오는 갈증은 비단 자연에 있는 것만이 아니다. 또 그것은 올해에 한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발등에 떨어진 불만 뜨겁다고 느끼는 마음의 메마름, 더 나아가 인간생활의 구비구비에 서린 有形無形의 비애를 감독할 줄 모르는 정서의 고갈에도 있다. 詩人이 위대하고 필요한 것은 이런 온갖 인간 비애를 內的으로 체험하고 또 他人의 情緖에 그것을 실감있게 호소하는 힘에 있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