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도 각 교구 또는 본당단위에서 여러가지 가톨릭악숀이 일어나고 그중에는 이미 많은 성과를 올리고 있는 단체들이 있다. 그러나 그 모든 활동은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각 단체마다의 종적(縱的)인 체계화는 물론 모든 단체가 각 계층에서 단합되는 횡적(橫的)인 협의체를 가져야한다는데 이론(異論)이 있을 수 없다.
또한 평신자 단체는 마땅히 평신자들의 발의(發儀)와 그 호응에 의하여 결성되고 성직자 측의 인준과 지도 내지 협조를 받아 활동하게 되어야할 것이다. 지난해 10월에 「로마」에서 개최되었던 제3차 세계평신자대회가 결의한 여덟 가지 결의사항 중 그 마지막 조항이 교회내의 모든 평신자 단체를 민주적인 방법으로 조직 내지 개편하라고 한것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이 결의는 종래의 수동적(受動的)이며 명목만인 평신자사도직 단체 또는 그 활동을 비판하는 동시에 자기의 소명을 깨닫지 못하고 성직자의 복사에 불과했던 평신자들에게 각성과 경고를 주는 성명이기도 했다.
지금 각 교구에서는 평신자를 포함하는 사목위원회가 생기고 각 본당에는 평신자만으로 또는 평신자가 주축(主軸)이 되는 본당운영위원회 등이 생기고 있다. 또한 지난 7월 23일에는 대전에서 각 교구의 평신자 대표와 전국적인 악숀단체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 한국 가톨릭 평신자사도직 중앙협의회를 창립했다. 모두 다행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특히 제2차 「바티깐」 공의회 이후부터 교회안에서는 평신자의 성소가 강조되고 그 사도직 활동의 중대성과 시대적 요청이 크게 드러나고 있는 이때에 우리나라 교회의 실정을 보면 아직도 많은 각 성이 아쉽다.
우리나라는 아직 선교의 역사가 짧고 교세가 약하고 겨우 전교지방에서 벗어나기는 했으나 아직도 「로마」의 보조를 받아야 운영되는 실정이기는 하나 그런 대로의 방법이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본당의 운영을 그 본당신자가 맡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신자가 미사성제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사제와 함께 미사를 올리는 사제단이 된다는 것과 같이 본당신자는 그 본당의 운영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운영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 운영위원회는 본당신자들의 자발적인 발의에 의하여 결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같은 교구내의 본당운영위원회는 그 주요규약이 통일되어야 하겠기에 각 교구장은 가장 이념과 실정에 맞는 준칙(準則)을 마련하여 산하 모든 본당에 보내어 그 조직을 통일·촉진시켜야 할 것으로 본다. 마찬가지로 각 본당 또는 교구마다 모든 사도직단체의 협의체가 결성되어야 하고 전국적인 중앙협의체가 있어야 한다. 이번에 있었던 한국 가톨릭평신자사도회 중앙협의회의 결성에 있어서도 순서적인 모순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교구에 따라서는 아직도 교구협의회가 조직되지 못한 곳도 있고 이번 결성대회가 지난번 전국 주교회의의 결의에 쫓아 추진된 것이라고 하니 결국 우리나라 평신자들의 각성이 부족한 일면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경고와 촉진없이 방치해 둘 수 없는 것이 오늘의 실정이다. 현실은 우리 교회의 전국적인 사도직활동이 시급하고 하루속히 국제적 활동에 적극 참여해야 할 필요에 부응(副應)하기를 촉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오는 10월 6일에는 「로마」에서 우리나라에 있었던 병인(丙寅) 순교자들의 시복식이 있다. 그 용감하고 슬기로운 거룩한 피를 받아 자란 우리 후손들로서는 마땅히 전국적인 축하와 추모(追慕)의 갖가지 행사가 있어야 하고 따라서 그 계획과 준비가 시급하다.
끝으로 오늘의 추세 속에서 간혹 말썽이 되기 쉬운 성직자와 평신자 또는 그 단체 상호간의 관계에 관하여 생각할 것이 있다.
대체로 성직자가 평신자를 복사같이 생각하던 과거에 대한 오늘의 조류(潮流)는 그 반사(反射)적인 경향을 나타내어 대립, 견제, 균형 협동의 「프로세스」 속에서 애매한 해결을 찾고 있는 것 같다. 전제(專制)는 자유를 낳고 자유는 불평등을 낳고 불평등은 평등을 갈망케하여 자유와 평등의 대결 속에서 20세기에 접어든 역사를 낳았다. 이 역사를 꾸미고 있다. 현세적 생활이 그런 역사의 진로를 찾고 있는 이때에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우리교회가 그 속에서 대립과 평등을 부르짖게 된다면 그 이상 빈축을살 일이 없을 것이다. 교회 안에서의 성직자와 평신자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이해(利害)의 상반(相反)이 있을 수 없다면 그 모든 관계가 공동체(神秘體)적 생리 속에서 이해되어야할 것이다. 따라서 교회내의 모든 단체의 조직이나 그 활동에 있어서는 스스로 현대적인 단체와 구별되어야 하고 그 모든 것이 사도적이며 복음적이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