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놈이 국민학교엘 다닐 때 일이니 3·4년 전이다. 아내가 姉母들이 모이는 자리에 다녀와서 하는 말이 아무개 어머니가 課外선생을 파면시켰다는 것이다. 6학년 담임선생님이나 과외수업선생의 전성시대에 감히 자모가 선생을 파면시키다니 무슨 이야기냐 했더니 이건 유행에 맞지 않게 구슬픈 과외 선생님의 「페이소드」한 토막이었다.
아무개 어머니 등 4명이 채용한 과외선생은 변두리국민학교의 50대 교감이었다. 6학년 담임을 여러해 지냈다는 「노련한 경험」을 사서 모셔온 것이었다. 그런데 그 어머니들의 4子女의 성적은 오르기커녕 下落一方이었다.
그대로 가다간 10位이내에 있던 4명의 성적이 中以下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급기야 4姉母들은 그 교감에게 과외선생의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月1萬원가까운 수업료를 내면서 성적은 떨어지고 이른바 3流以下의 女中밖에 응시치 못할 생각을 하니 선생의 체면적도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렇게 모진결단을 내리게 한 어머니들의 결심이 주춤하게 되었다. 老과외선생이 『아들의 大學進學을 위해 들고 있는 계가 두 달이면 끝나니 그때까지만 부지하게 해달라』고 간청을 한 것이다.
어머니들의 딸을 생각하는 마음과 아버지의 아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利害를 달리해서 얽힌 것이다. 어머니들은 이틀 후 최종결정을 내리기로 하고 다시 숙의한 끝에 그날 「파면」을 결정했다는 이야기이다.
결국 그 4子女中 1명만이 1次지원에서 합격하고 3명은 2次를 쳤는데 그중 1명은 2次에서도 떨어지고 말았다.
이렇게 어버이를 무자비한 사랑에 빠뜨리게 하고 師道를 저바리게 하던 中學入試지옥은 일전 문교부가 내린 단안으로 일단 해소되는 듯하다. 학부형도 그 지긋지긋한 악순환의 齒車에서 풀려난 기분이었다. 그런데 서울市內 국민교 교장회의에서 師親會를 만들어서 교사들의 생활을 보장해야겠다는 뜻의 건의를 했다. 교련서도 이를 뒷받침하듯 師親會같은 모임이 있어야한다고 발표했다. 물론 自由黨時代의 그 거센 치마바람을 일으키던 師親會가 아니라 學校와 家庭을 부드럽게 연결하는 교량으로서의 모임을 주장하는 것이지만 學父兄들의 마음은 다시 섬찍하다.
高校入試지옥으로 3年이 연장되었다 뿐이지 一流校에의 집념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과거 유치원서부터의 과외수업이 국민교 3·4학년때부터 시작된다는 뜻이 된다 국민학교나 중학교는 학적을 얻기 위한 형식적 학교가 되는 대신 학관 따위의 과외시설이 진짜실력양성의 마당이 될 가능성이 짙다.
이런 경우 師親會같은 모임이 「무자비한 사랑」의 자모들에 의해 어떻게 변형될지 짐작이 가고도 남고 있다.
南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