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으로 싼달을 신은 것은 女學校 二學年 때였었다고 記憶한다. 七월에 들어서자 바닷가의 소나무 숲에 林間學校를 만들어 本校에서는 授業이 없었다. 林間學校의 授業은 스켓취·手藝 가벼운 文學作品의 감상과 수영뿐이었다. 學期末試驗도 끝나 放學을 기다리던 우리는 만냥 즐겁기만 하였다.
게다가 三伏中에도 소매가 긴 하늘색 쎄일러 제복에 하얀 무명양말 까만 구두를 신고 동근파나마모로 빈틈없이 몸을 가리고 다니다가 水泳服이 아니면(上學年과 下學年이 교대로 바다에 들어갔기 때문에 사실상 줄곧 永泳服만 입고 있었지만) 簡單服(주로 소매가 짧은 원피이스) 차림으로 바뀌어지니 少女들은 解放을 맞는 것처럼 거운해 했다.
짧은 소매의 간단복을 입고 보니 흰무명 양말이 쑥스럽고 윤나는 까만 구두가 유난이 무거웠다.
林間學校가 시작된 지 사흘날 양조장집 아이가 보지 못하던 신발을 걸치고 왔다. 발바닥 크기만큼 발바닥 모양으로 깎은 나무판때기에 흰색과 하늘색의 책크로된 텐트천이 가로 걸쳐지고 하얀 맨발이 그 천띄에 꿰어져 있었다. 모여든 아이들에게 그는 득의를 억지로 눌르고 말했다.
『이거 싼달이야. 미혜네 집에서 샀어』
양품점집 딸인 미혜가 이튿날 노란천의 발걸이가 걸린 싼달을 신고왔다. 시원해 보인다기보다 무척 멋이 있어보였다. 며칠가지 않아 우리 반에는 싼달을 걸치지 않는 아이가 거의 없어졌다.
풀속에 毒虫이 숨어 있기도 하는 林間學校에서는 구두가 훨씬 安全한 신인지도 몰랐지만 얼마안가 全稜生의 거의 全部가 바닷가에서는 싼달을 신게 되었다.
사실 바다에 들어갔다 나와 젖은 발에 구두 같이 기분 좋지 않은 것은 없다. 젖은 발을 닦을 번거로움도 없어져서 싼달은 人氣가 높았다. 그러자 처음에는 그져 편편하였던 바닥나무 뒤가 약간 높아지고 갈색 순색흑색을 칠해 나무결을 돋구기도 하고 발걸이천도 여러가지로 고운 물감을 드려 그것이 멋이 되었다. 싼달은 林間學校에서만 愛用된 것이 아니고 집에서는 물론 대수롭지 않은 外出에도 곧잘 신켜졌다.
간편하고 가볍게 신겨졌던 싼달에 전體重을 의지하게 된 것은 太平洋戰爭이 시작되고 부터다. 極度의 物資難에 고무신 구두는 貴重品중에도 으뜸을 다투는 貴重品이었다. 힘들여 손에 넣은 구두 고무신을 아끼기 위하여 마지못해 싼달을 신었다. 戰爭이 치열해지자 싼달 만드는 솜씨는 형편이 없어져서 툭하면 발걸이가 떨어졌다. 걷다가 이 발걸이가 떨어지면 아무렇게나 못으로 두들겨 박곤하기 때문에 발걸이천이 이내 망가졌다.
귀찮고 번거롭고 을씨년 스러운일이 싼달로 인하여 자주 생겨 싼달이라면 缼乞의 상징같이만 느껴졌었다. 그래선지 解放後 다른 신을것이 손쉽게 얻어지고부터는 싼달을 신을 생각이 없어졌다.
싼달은 누가먼저 신었던 것일까? 희랍조각을 보면 비슷한 것이 발에 신켜져 있는데 물론 現在것과 꼭 같지는 않다하더라도 起源은 거기 있는지 모르겠다. 맨발로 걸어도 무방한 南歐에서 신을 것 같기는 하지만 古美術에서보는 희랍조각의 衣裳주름이주는 重厚感에 비해 신고 있는 것이 언뜻 보기에 「발얼개」로 보여 너무 초라하다. 심지어는 투구갑옷으로 중무장한 사람도 싼달 비슷한 발열개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옛날사람의 발바닥은 우리것 보다 훨씬 두꺼웠던 모양이다.
며칠전 양화점 앞을 지나노라니 실로 형형색색의 싼달이 수없이 진열되어있어 저도 모르게 발을 멈추었다. 그렇게 많이 진열되어 있는 것이 민망할 정도로 그 앞에서는 사람이 드물다. 이제 싼달은 신기한 것도 아니고 또 전體重을 담아야 할 만큼 不可缼한 것도 아닌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웬지 반가웠다. 며칠후 바닷가로 떠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리 골르지 않고 한켤레를 사기로 하였다. 마닐라삼으로 발걸이를 만든 수수한 것이다. 맨발에 까실한 삼의 감촉이 신선하였다. 처음 싼달을 신었을 때의 감촉이 어렴푸시 되살아나 그리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바다行이 기다려지는 것이었다. (끝)
韓戊淑(作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