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신병으로 노상 시름 시름 하기 때문에 때마다 죽음을 묵상하게 된다.
그래서 죽음에 향한 나의 공포심을 요약해 보면 첫째는 죽음에 이르는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요, 둘째는 죽은 후에 올 未知의 세계에 대한 불안이다. 그런데 첫째 죽음에 대한 고통은 왕왕이 우리 삶의 고통이 너무 심하면 오히려 죽음의 安息을 원할 때가 있다.
나의 직접 경험한 바로서도 해방후 북한에서 筆禍사건으로 공산당의 결정서를 받고 탈출하다가 체포되었는데 때마침 겨울이라 火氣하나 없는 유치장에서 얼어 드는 추위와 피곤과 절망으로 휩싸여 오직 죽음만이 간절한 시간을 보낸 일이 있다.
또 한번은 在작년 日本서 肺空洞切開라는 수술을 받았는데 이것이 그만 惡化되어 열이 40도를 넘고 無氣肺가 되고 옆구리에 받은 고무管에는 出血이 멈추지를 않았다. 이때는 몽롱한 의식 속에서나마 죽음이 그리움으로 나타난 적이 있다. 이것은 내가 육신적 고통을 손쉽게 든 것 뿐이지 우리의 삶 속에는 정신적 시달림이나 고통 속에서도 죽음의 안식을 필요로까지 하는 때가 얼마든지 있다.
그러면 둘째것 즉 죽음 후에 오는 未知의 세계에 향한 불안이란 어떤 것일까? 가령 죽음 후에 아무것도 없다면, 즉 우리의 영혼이 不滅하는 來世가 없이 육신의 죽음으로 완전 종말을 짓고 만다면 불안이고 공포고 있을 것이 무엇일까.
그야말로 生也一片 浮震起요 死也一片 浮震滅이어서 그만인 것이다. 그렇다면 無信仰者들의 죽음에 대한 不安한 認識이란 『너무나 아프기 때문에』 싫은 것일까. 이것은 藥品으로서 安樂死가 가능하기도 하다.
이렇게 따져볼 때 죽음의 불안에 대한 正體는 來世에 직결되어 있다. 그런데 이야기는 이제부터다. 왜냐하면 來世를 믿는다는 우리는 왜 죽음이 불안하고 두려워지는 것인가. 이것은 역시 신앙을 가졌다면서도 來世에 대한 確信이 없기 때문일까. 만일 우리가 來世를 확신한다면 어쩌면 未知의 나라에 여행을 떠나듯 죽음을 태연히 맞이하고 그 길을 떠나야 할 것이 아닌가.
近世의 大德이었던 교황 요안 23세는 臨終 앞에서 『旅行具는 다 채비 되었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 이 旅行具의 준비가 문제다. 그래서 저 原始信仰의 사람들도 저승의 路需를 갖추어 노내려 든다. 결국은 불안의 正體가 來世의 吉凶에 달려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껴안고 산다. 이때문에 인간은 無限을 품고 있다. 이 無限 속에서의 可能性을 인간 스스로가 선택하고 결정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죽음 앞에 不安과 戰慄이 있는 것이다. 하나는 영원한 生이요, 하나는 영원한 죽음 上下의 벼랑 앞에서 떨리지 않는다면 오히려 거짓말이다. 더우기나 죽음은 도적처럼 不時에 오는 것이기에 그 不安은 恒時的이다.
저 武漢의 두갈래 길을 예수께서는 눈에 뵈듯이 確然이 제시하신다. 또 이 極樂과 永苦의 세계는 東西를 막론한 우리 인간의 마음 속에 自然으로 不動하게 浮彫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
죽음은 확실히 生보다 나을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다. 오직 그 어떤 入場券이 준비되어 있느냐 하는데서 죽음의 意味는 달라진다. 또한 이판단이 스스로 설 정도로는 이 세상을 잘 살아야 한다. 그리고 充足한 채림으로 外國旅行을 떠나듯 동경과 好奇心과 즐거움을 가지고 죽음을 맞이하여 보지 않으련가-.
具常(詩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