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처럼 貴한 몇분의 聖職者와 數많은 敎友들의 生命을 大院君의 暴力이 앗아간지 百年. 殉職先烈들의 피로 물드렸던 새남터 白沙場과 福者들의 爲主致命한 그 「피와 물」을 씻어 悠悠히 흐르는 韓國의 象徵 漢江水를 애타게 지켜보든 切頭山. 거위에 이제 殉敎紀念聖堂이 세워졌다. 丙寅敎難 百年만의 일이다. 그리고 切頭山은 山 이름 그대로 韓國의 「골고타」다.
暴力을 휘두르던 大院君도 이제 가고없다. 數많은 致命者들도 다 가시고 이제 地上에는 계시지 않는다. 그 當時 背敎한 敎友도 冷淡한 敎友들도 이제 다 世上을 떠났다. 그러나 暴力은 如前히 人間과 더부러 살아있어 그 橫暴는 大院君의 그것에 못지않게 强力하다. 暴力에 굴함없이 暴力을 받아드려 財産도 地位도 名譽도 學問도 버리고 家族도 妻子도 愛人도 버리고 마침내 生命까지도 眞理의 保全과 그 具顯을 爲하여 欣快하게 버린 致命福者들은 『聖父께 降福받은 韓國사람들이 天國의 門에 들어와서 天地創造 그날부터 자네들을 위하여 마련해 둔 이 天國을 가지라. 자네들은 내가 배고플 때 먹여주었고 목말라할 때 마시게 해주었고 나그네로 집없이 露宿할 때 宿所를 마련해 주었고 헐벗고 있을 때 입혀 주었고 병들어 누었을 때 위로해 주었고 옥에 갇혀 있을 때 찾아주더니 마침내 義를 위하여 生命까지 버렸으니 장하도다. 어서와 天上의 福樂을 누리라!』 환영사와 더부러 切頭山을 발판으로 고통과 시련의 世上을 떠나 天國의 百姓이 되셨던 것이다.
殉敎先烈들이 暴力 앞에 「沈默」하는 그 「敎會」를 切頭山은 目擊했고 義를 위하여 뿌린 鮮血을 함뿍 받아 입은 切頭山은 江山도 녹는 쓰라림 속에서도 天上의 장엄한 환영의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切頭山은 계레를 지키는 證人이다. 이제 그것을 證言하지 않는가.
暴力없이 爲主致命은 있을 수 없다. 暴力 앞에 참수되지 않고 어찌 天國의 門을 바라볼 수 있으랴. 天主님의 眞理가 우리 안에 永遠히 居하는 것처럼 暴力도 恒常 우리와 더불어 같이 있는 것이다. 20世紀는 暴力으로 가득하다. 科學이 발달했다. 발달된 科學은 굼주리고 헐벗고 病苦에 누워 露宿하는 兄弟를 버려두고 그 兄弟를 죽일 計略만 꾸미고 있다. 失望한 兄弟들은 「天主의 죽음」을 幻像한다. 人間不在의 科學과 知識은 「하느님의 被殺」을 宣言한다. 이 엄청난 暴力들 속에 우리들은 있는 것이다.
한편 無關心이란 暴力도 있다. 物質文明에 도취되고 安逸한 生活의 捕虜가 되어 하느님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無限한 사랑을 느껴볼 생각도 못한다. 地位와 名譽와 體面이란 暴力도 있다. 敎理를 배우고 領洗入敎하는데는 이러한 暴力이 作用해 온다. 이 暴力을 避하려는 者들에게는 背敎와 冷淡의 길 밖엔 없다. 情慾의 暴力은 물길처럼 우리의 理性을 옹습한다. 이 暴力들과 妥協하는 날 우리는 무엇으로 天國의 門을 열 수 있겠는가. 苦痛스러운 世上이다.
한편 兄弟들은 굶주리고 있다. 헐벗고 있고 목말라 하고 차거운 밤길에 露宿한다. 病苦에 慰勞없이 시달리는 兄弟들은 얼마나 많으냐. 옥에 갇혀 自暴自棄와 絶望의 나날을 보내는 兄弟들은 우리를 쳐다본다. 우리에게는 크나큰 壓力이다. 이러한 無數한 暴力의 물결 속에 우리는 나만은 잘 살아야 하겠다고 暴力을 外面해 버리고 싶어한다.
이러한 生活 속에서 우리의 마음은 切頭山처럼 「골고타」의 骸骨山처럼 不毛의 차거운 石山이 되고 말았다. 暴力은 暴力으로 무찔러 보려고 꿈꾸는 것이 現代人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暴力을 사랑으로 對할 것을 가르치신다. 殉敎의 先烈들은 暴力 앞에는 오직 沈默으로 自己犧牲만이 그 對處의 길로 垂範하셨다. 남을 죽이는데 暴力이 必要치 않고, 내 마음을 내가 그 暴力으로 죽여야 할 것을 가르친다.
이제 우리도 우리의 荒廢하고 冷淡한 마음에, 남을 죽이고 싶은 그 切頭山에 殉敎의 紀念聖堂을 건설하자. 聖神의 궁전을 꾸며 새로운 생명을 싹트게 하며 침묵한 가운데 내 머리를 흠연히 暴力 앞에 내밀자. 내마음을 지킬 殉敎聖堂은 初代敎會처럼 丙寅年 敎難 6年을 침묵속에 갈아난 우리의 祖上처럼 兄弟愛에 불타리라.
初代敎會에도, 韓國의 初創敎會에도 傳敎를 爲한 學校나 「매스콤」, 病院은 없었다. 그들은 人間愛에 불타는 마음씨 하나 밖엔 없었다. 그런데도 그처럼 많은 人間들을 主님의 길로 引導했고 생명을 바칠 수 있는 信仰을 길러냈다. 只今 우리는 宣敎時代를 淸算하고 우리들 스스로가 兄弟들을 救하는 布敎時代를 맞았다. 가톨릭大學 · 中高校 · 新聞 · 雜誌 · 病院들은 가톨릭을 宣敎할 수는 있어도 그 驚魂을 救할 수는 없다.
宣傳은 어디까지나 知識에 끄친다. 知識은 信仰이 아니다. 信仰은 마음과 마음의 一致, 地上과 天上의 一致, 人間과 人間의 一致에서 움트기 때문이다. 내 마음의 殉敎聖堂이 밝히 비추는 永明燈의 불빛따라 祖上들이 겨레를 救한 그 참된 人間愛로 어떤 暴力 앞에서도 우리 서로 손잡고 勇敢하게 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