例年대로 待臨節이 왔다. 새로운 典禮週年이 시작된다. 가을에는 낙옆이 지고 겨울에는 그것이 蘇生한다. 이것이 지상에 있는 生命의 「리듬」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해를 통한 神과 우리와이 生活의 「리듬」이 영적 계절을 통해 하나의 「리듬」을 따른다. 待臨節은 하나의 영적 계절과 같다. 즉 神을 고대하는 계절이다. 神이 이 지상에 오기전 아브라함부터 洗者 요한까지 2千年동안 그를 고대했다. 이것은 하나의 사실이다. 待臨節은 오늘의 우리의 生活 속에 볼 수 있는 이 苦待의 反響이다. 그러나 그는 벌써 오셨는데 왜 그를 고대해야 하는가 반문할 수 있다. 사실이다. 구세주는 이미 오셨다. 그는 2千年前에 「베틀레헴」에서 나셨다. 우리는 그가 아직 나시지 않은 것처럼 고대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그를 고대함으로써 우리의 생활 가운데 오실 수 있다면 우리에게 그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요약해서 말하면 그의 성탄전 그를 고대한 모든 이의 영적 태도가 그의 성탄후 그를 고대하는 우리의 영적태도이다. 그것은 계절처럼 神과의 우리의 靈的生活 속에 불가피한 하나의 段階와 같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또 이 세상에 아직 충만히 오셨다고 말할 수 없다. 그이 없이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며 그이아 함께 있으면 모든 것을 얻는다는 것을 이해하자. 교회헌장 첫 조항을 읽어보라. 세계는 지금 神과의 일치와 전 인류의 일치의 危機를 경험하고 있다. 처참한 세계 제2차대전이 종식한지 20년 이상이 지난 오늘 아직 해결되지 아니한 긴장이 세계 여러군대에서 이 危機의 요소처럼 남아있다.
교회헌장은 이 위기에 대답하는 것이다. 긴급한 것으로 만들어 주고 있는 現代의 상황에 우리가 제공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반성해 보자.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 완전한 일치를 실현하기 위해서이다.
성탄! 「파티」와 선물교환으로 지새울 밤인가? 혹 광란의 밤인가? 待臨節은 이세상 마칠때 예수께서 재림한다고 특히 말한다. (모든 서간경과 대림 첫주일 복음) 성탄과 이 예수의 재림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가? 구세주의 재림은 성탄의 완성이다. 神이 우리와 함께 우리안에 계신다. 神은 모든 이 안에 모든 것이 된다. 성탄은 출발점이요 主님의 재림은 도착점이다.
이 主님의 재림이 決定的인 마지막 성탄이 될 것이다. 그때는 神이 우리와 함께 우리가 神과 함께 영원히 있게될 것이다. 이렇게 神을 고대하는 우리의 靈的 태도는 2千年 이전의 묵은 과거로 향하는 길이 아니요 장래를 향하는 길이다. 이것이 모든 인류역사에 참 뜻을 준다. 예수께서 나셨다. 그는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 오셨다.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그는 어디 계실까 우리가 그를 영접하지 않으면 그의 성탄을 그냥 축제기분으로 지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성탄을 맞이할 때마다 그의 現存을 더 느끼고 우리안에 그가 더욱 生活하도록 하자 主님이 우리에게, 우리 생활에 또 우리로 하여금 오늘의 세계에 오실 수 있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 있다.
첫째 現世界는 끝이 있을 것이라고 명백히 말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우리의 마음을 두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무한히 원해야 할 분이 그분이다. 우리에게 神의 생명과 영원한 기쁨을 나누어 주셨지만 그는 우리를 강요하지 않으신다. 이 待臨節에 神을 원하는 마음을 증가토록 하자.
둘째 神은 우리를 잠간만 訪問하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죄 때문에 병들고, 귀먹고, 눈멀고, 죽은 자였다. 그러나 그는 병을 고쳐주시고 죽은 이를 부활시키시려 오신다. 그를 고대하려면 죄인다운 태도를 취해야 한다.
구세주만이 죄인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 洗者 요한은 『그가 너희 가운데 계신다』고 말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서도 진실이다. 말씀과 성사와 교회와 형제들을 통해 우리 가운데 계신다. 우리는 그의 기적적인 발현을 기다리지 말자. 미사의 복음과 영성체와 이러한 이웃과 저러한 독서로써 우리의 문을 두드리신다. 그가 안계시는 곳에 그를 찾으러 가는 대신 그에게 문을 열어 줌으로써 그를 인식하기를 배우자. 전번 본란은 성탄을 맞이하여 고아 · 병자 · 극빈자 · 수감자 군인들에게 성탄절의 참선물을 보내자고 제안한 바 있는데 역시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앞두고 이웃을 통해 예수께 문을 열어주는 「친절」 한가지를 더 첨가해보자. 요즘 도로포장을 맡은 군인아저씨께 선물하는 광경을 신문紙上에서 볼 수 있는데, 우리에게 봉사하는 교통순경 · 우편배달부 · 쓰레기나 오물 철거인들도 기억할 수 없을까? 어느나라에서는 크리스마스때 교통신호등 밑에 산데미같은 선물을 받고 즐거운 비명을 올리고 있는 교통순경의 사진을 독자는 신문에서 모앗으리라 믿거니와 그외 외국에서 우편배달부를 크리스마스때 생각하는 것은 상식으로 되어있다. 이런 것은 하나의 예(例)이다. 우리도 이런 기회에 그들 앞에 풍성한 선물 꾸러미를 한아름 안겨주자.
넷째로 우리는 神을 속일 수 없다. 우리의 마음이 신을 진짓되이 찾고 따라서 그의 뜻을 받아들이거나 혹 우리의 肉的慾望을 듣고 그에게 등을 지거나 양자택일 할 수 있다. 우리의 自我主義 · 不義 · 거짓 · 원한 · 폭력 등을 그는 원치 않으신다. 이 모든 것을 버리기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신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에서 어떻게 그가 우리에게 올 것인가. 그러나 이 待臨節에 모든 것 위에 신을 더 원한다면 또 죄인으로서 그를 유일한 구세주로 고대한다면 교회안에서 이웃안에서 그를 찾는다면 그에게 의합(義合)치 않는 것을 끊어 버린다면 성탄절에 우리는 광명과 기쁨과 영광으로 넘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