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反射鏡자리에서 「릴케의 가을」을 감상한지가 엊그제 같은데 오늘 우리는 또 가을에 있다. 인간은 부단히 성장 쇠퇴해 감으로써 어느 한순간도 같은 순간을 유지할 수없는 것인데 비해 자연은 이처럼 부단히 같은 현상을 되풀이해야 한다. 동일한 가을의 현상을 두고 작년의 「나」 와 오늘의 「나」는 다른 이야기를 하며 느낌도 달라야할 것이다. ▲이렇듯이 인간은 낡은 것을 되풀이 할 수 없고 같은 상황에서 조차 부단히 새로운 것을 思惟하고 모색하여 발전하려는 것은 인간 本性의 당연한 일면일 것이다. 이런 本性이 생활의 타성으로 말미암아 마비되어 항상 同一한 상황에만 빠져있고 그것을 안일하게 누릴때 거기엔 어쩔 수없이 권태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사실 어떤 부단한 자기 모색이 없는 인간은 자신이 처해있는 안일한 현실에 만족한 나머지 권태롭다거나 불행하다는 의식조차 갖지 않을지 모른다. 일전 某週間紙에 한 젊은 文學家가 돌연히 出家를 한 기사가 있었다.
그는 태생부터 유족한 환경에서 成家를 한 후에도 귀여운 처자를 거느리고 소위일반적인 의미에서 행복한 청년이었던 모양이다. 그의 가출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사실 適者生存이요. 무엇보다 메카니스틱한 現代社會에서 각자는 자기 현실을 제 나름대로 구축하고 거기에 집착해있는 나머지 그러한 자기 현실을 탈피하고 뛰쳐나오기란 거의 영웅적인 용기를 요구하는 것만큼 어려운 건지 모른다. 그러므로 지극히 現實的이며 小市民的인 現代人에 있어서는 가령 영웅적인 과업수행이니 각고의 克己나 금욕이라든가 순교자적인 정열이라든가 하는 따위는 그야말로 가소롭고 쑥스럽기까지 한 영웅주의 따위로 밖에 들리지 않을 런지 모른다. ▲따라서 그들에겐 일상적인 행복이외 무슨 神이라든가 죽음이라든가 사랑이라든가 하는 근원적이요. 영원한 테에마에 대해선 무의식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외면하려는 느낌조차 있다. ▲9월은 복자성월이다. 어제 교회는 순교정신을 고취하고 앙양하는 것이 우리의 크나큰 과제다. 이러한 현대인의 生理에 우리는 단순히 순교자의 영광이니 그 영광된 후손의 자랑이니 피의 신앙이니 이런 종교적 인상투어나 선전만으로 그들에게 과연 얼마마한 감동을 줄 수 있을까? 인간이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용기는 現代人에게는 물론이요. 인간에게 영원히 內在해 있는 本性的인 가능성이라는 것을 우리는 좀 더 現代的이고 리얼리티한 언어와 수단 방법으로 表現할 필요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