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리자」의 표정 속에는 신비한 미소가 번져 있는 것이 특색이라고 한다. 그런소릴 듣고 그 그림을 봐서 그런지 아닌게 아니라 「안웃는」 표정같은 그 표정 속에서 평화롭고 자애로운 미소의 채온이 느껴지는 것 같다. 그런데 어떤 외국인은 한국에 와서 「모나리자」의 미소와는 아주 이질적인 「신비한 미소」를 한국인이 표정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아마 미소할 때와 장소를 분간 못하는 한국인의 표정을 비꼬아 한 말인지도 모른다. 까닭없이 싱겁게 웃는 미소. 남이 잘못했거나 실수를 했을때 낄낄 웃는 모습. 자신이 망신스러운 실수를 저질러 놓고 웃는 표정.
「표정이 세련되어 있지 않다」는 증거물(?)로 이같은 점을 점검하다 보니 생활주변에서 이 「웃음의 표정」으로 인해 인간관계를 얼마나 어둡게 만들고 있는 것인가를 생각하게끔 한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 좌우를 살피지 않고 건너다가 자동차에 칠뻔했던 다음순간 창백해진 운전사를 쳐다보고 씨익 웃는 아주머니나, 만원버스안에서 남의 발을 밟고도 마음속으로만 「미안해 어떻거지?」하면서 밟힌 사람을 쳐다보고는 멋적게 웃는 여학생들… 이 모두가 「신비한 미소」를 발산하는 유형에 속할 것이다. 인간관계란 말은 1924년대에 「하버드」 대학의 경영대학원 에이요 교수에 의해 생겨낫다지만 이제 수3년전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유행어처럼 「인간관계」란 말이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인간관계를 맺는데 있어서의 기본은 가지가지 학문적인 설명이 있다. 그러나 메이요 교수보다 1천9백년전이나 앞서서 인간관계의 기본을 설파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 아닌가 한다. 예수님은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인간관계의 시발점을 가르치신 것이다. 「사랑」이 밑바탕에 깔려있는 미소만이 인간관계를 「스므스」하게 이끌 것이다. 인정으로 얽히기 쉬운 한국사람에게 서구적인 합리주의적 대인관계는 때로 냉냉하다는 협의를 받기쉽다.
한국의 가톨릭안의 인간관계의 풍토는 「또 하나의 다른 제3의 신비한 미소」 속에 독선되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인간관계」 문제는 경영학의 독점물이 아니다.
교육계에서도 크게 도입 활용하고 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지상명령으로 삼는 가톨릭에서는 벌써 인간관계문제를 소중히 다루고 있어야 옳았겠다.
역시 「모나리자」는 표정 속에서 사랑의 의미를 풍겨주는 인간관계의 신비한 교시체(敎示體) 같기만 하다.
申태민(言論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