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社說(사설)] 그리스도敎(교)와 그리스도敎(교) 文化(문화)
敎會(교회)의 現世性(현세성)은 新文化(신문화) 形成(형성) 促進(촉진)하고
敎會刷新(교회쇄신)은 本質的() 본질적變化(변화) 아닌「現代化(현대화)」다
최근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교회쇄신은, 지금까지 절대 불변적 진리라고 믿어 왔던 그리스도교의 본질적 원리가 전복되는 듯한 인상을 주어, 일부 신자들에게 적지 않은 심적 동요를 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심적 고민을 극복하고 교회쇄신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리스도교와 그리스도교 문화와의 차이를 명확히 하는데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리스도교와 그 신앙 내용은 그 자체가 불변적이며 종교적 신조로 서 그것을 신앙하는 자들에게는 절대적 의미를 가졌다. 온전한 그리스도교적 진리는 하나밖에 없고 진정한 교회 역시 단일, 유일하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문화는 그리스도교가 결과케한 불변적 유일한 것이 아니고 다종다양할 수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교 문화」라고 함은 그리스도교인들의 현세적 공동생활을 위한 제도와 그리스도교적 인생관에 입각한 다양한 정신적 활동 및 그 성과를 뜻한다. 환언하면 교회의 성원인 신자들에 의하여 획득된 지식 윤리 법률 예술 관습 등을 포함한 복합적 총체를 말한다. 그리스도교와 그리스도교 문화가 동일하지 않음은 그리스도 교회와 그리스도교국이 동일하지 않음에 비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현대세계에는 새로운 그리스도교 문화가 형성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의 그리스도교 문화와 형태상으론 다르다고 할지라도 동일한 그리스도교적 원리에 입각한 문화인 것이다.
그리스도교적 원리는 어떠한 역사적 시대에도 구현될 수 있다. 현대의 여건은 틀림없이 과거의 여건과 다르다. 인류는 질적으로 상이한 시대를 통하여 존속하고 있고, 그 이질적 시대들은 그리스도교적 원리를 구현하는데 이질적 여건을 제공한다.
그리스도교가 역사 안에 존재하면서 역사를 초월해 존재하는 것처럼, 그 교회 역시 두 모습을 가졌다. 즉 초자연적, 초현세적 면과 자연적, 현세적 면이다. 교회쇄신이란 그리스도교의 어떤 본질적 변화가 아니고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이 역사적 시기에 있어서의 교회의 현대화를 뜻한다. 다시말해서 그리스도교를 현대에 구현화하는 것 즉 현대적 그리스도교 문화의 형성을 말한다. 그리스도교 문화가 구조, 형태상으로 가변한다는 것은 교회의 현세성에 기인한다. 교회는 시간안에 존재함으로 시간을 지배하는 자연법칙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이 법칙도 초자연적, 초시공적 가치는 제약하지 못한다. 그래서 어느 시대의 그리스도교 문화는 생성 소멸하지만, 그리스도교와 그 교회는 소멸되지 않는다.
교회의 현세성에 의하면, 교회는 또한 공간 안에 존재하며, 이질적 지역의 여건 즉 그 지역 고유의 전통과 사회적 조건하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현대적 구현은 지역화를 수반하게 되고 이것이 곧 「토착화」이다. 한국의 교회쇄신 운동은 현대적이면서도 한국적인 그리스도교 문화 형성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한국의 그리스도교와 서양의 그리스도교 문화를 동일시 하여, 서양의 교회쇄신의 결과를 그대로 도입 모방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신문화 형성기에 놓인 교회 안에는 지금 두 극단적 경향 소위급진 보수의 서로 상반되는 과격파가 있다.
급진주의자는 현대 문명이 마련한 「신천지」에 매혹되어 새로운 것만을 추궁하며 과거의 역사적 경험을 오류로 단정하고 구시대의 전통과 문화를 부정한다. 구시대의 문화나 역사적 경험을 그대로 현대에 계승하는 것도 잘못이려니와, 전적으로 부정한다는 것도 역시 큰 잘못이다. 왜냐하면 온고지신(溫古知新)이 없는 문화는 편견에 치우치기 때문이다. 과거의 전통과 고유문화의 업적과 공헌을 시인하고 그 장점은 귀중한 유산으로 계승해야 하지 않을가?
그와 반대로 보수주의자는 교회쇄신이 본질적인 것의 변화를 초래하지나 않나 의심하고 경계하며, 현재를 과거의 눈으로만 보고 교회의 앞날을 심히 우려한다. 그것은 교회와 그리스도교 문화를 구별 못한데서 오지나 않는지? 그들의 오류의 원인은 역사 과정의 가견적 사건들은 쉴새없이 진전 되고 있는 구원의 역사의 흔적에 지나지 않음을 인정치 않거나, 하느님이 역사를 다스린다는 것을 망각하고 과거의 생활형태를 불변한 것으로 고정해 둘려고 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들은 역사를 통해서 사랑과 구원의 계획을 실현하시려는 하느님의 의도에 역행한다고 볼 수 있다.
진정한 그리스도교인은 극단론자가 아니다. 급진주의자도 보수주의자도 아니고 중용의 길을 걷는 자이다. 언제나 마음의 평정과 건전한 식견을 지녀 당면문제를 이해할려고 힘쓰고 변화하는 것과 변화하지 않는 것을 식별할 줄 알고 변화하는 것에 대해서 경계하거나 방해하지 않고 쉽게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초조하거나 실망하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 교회의 현대화와 토착화라는 대과업에 있어서 관찰자인 동시에 주인공임을 자각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가 무엇인지 파악하여 묵묵히 실천함으로써, 역사 안에 하느님의 계획을 실현하는데 적극 참여하는 자이어야 한다.
하느님의 계획이란 다름이 아니고 인류사안에 하느님의 육화(肉化) 즉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의 구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