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막 「사이공」 주교좌성당에서 주일미사 참예를 하고 돌아온 길이다. 서울 명동성당 보다 길이도 폭도 여남은자씩 넓은 건물로 1880년 준공표지가 있었다. 이 성당도 성모마리아가 주보인듯 안팎에 성모상을 모셨고 좌우벽에 작은 제대들이 여러개 있는데 그 앞에다는 봉헌한 촛불을 수없이 켜고 있는 거이 우리에게선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미사경문의 합송은 우리보다 나은편이고 그 송경소리도 비음(鼻音)이 많아 아름답게 들렸다. 이곳에서만은 나는 월남인들과 이질감도 없이 오직 천주의 같은 자녀라는 가몽속에 있을 수 있었다.
나는 이번 월남전선 방문중 각 부대에서 종군신부님들을 뵈웠고 교우들을 만났다. 특히 「퀴논」의 맹호부대는 부사단장 金遺腹 장군이 교우여서 그의 주선으로 거기 사단 千信基 신부님, 포병사령부 金得權 신부님과 더불어 하룻밤 환담할 기회를 가졌었다.
또 이 맹호부대에서는 주둔지 이웃인 「까난」이란 마을에 건평 70평짜리 성당을 짓고 있었다. 현재 공정은 60% 진섭되고 있었는데 이제 종은 파월 한국기술자 교우들이 헌납하게 되고 14처 성로신공상은 미군신자들이 기증하게 된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이 성당의 주인이 될 월남현지민 교우들의 협력이나 반응은 별로 신통치 않은 모양이다. 이런 점에 우리군과 월남교회와 중간에 끼어있는 종군신부님들의 고충이 있으시다는 것이다.
이런 일화도 있었다. 이곳에와 用役사업으로 연간 3천만불의 계약고를 올리는 한진(韓進) 회사에서는 맹호사단의 대민사업을 위해 피아노 한대를 기증했다. 김 장군은 이 피아노를 가톨릭이 경영하는 「진붕」여학교에다 애를 써서 돌렸다. 그런데 그 학교당국에서는 피아노 보다는 텔레비를 주었으면 더 좋겠다고 하더란 이야기다.
이것은 극단적인 예요, 또 의사소통이 서로 잘 안되어서 와전된 것인지도 모르지만 월남의 民度는 도시와 농촌이 너무나 차이가 현격하여서 「사이공」 같은데는 西歐의 첨단적인 문화수준을 가는가 하면 농촌의 생활은 원시적인 형태로 남아 있고 그들의사고방식도 우리가 이해못할 정도로 유치한 면이 있는 것 같다.
종군신부님들과 환담에서 그분들이 재삼 재사 부탁하는 것은 교회서적을 좀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본국에서 신앙에 무식하던 장병들도 生死를 눈앞에 놓고는 영혼문제게 눈뜨기 시작한단다. 그들은 처음엔 오락잡지나 흥미본위의 독서로 전투사이의 휴식을 메우지만 대개는 이것도 싫증이 나서 종교서적을 찾게된다는 것이다. 이 맹호부대에는 멀지않아 도서실이 갖추어 지는데 거기에 우리 가톨릭 서적이 얼마만큼이라도 채워졌으면 하고 아쉬워한다.
이번 우리 일행(金八峰 · 政飛石) 중 불교신도인 金八峰 선생은 觀音像 銀메달(한개 싯가 500원)를 500개나 가지고 와서 불신자 장병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었다. 상본 한장도 못가지고 떠나온 나는 못내 부끄러웠다. 우리 각 본당에서도 파월장병교우나 또는 전체용사들을 위해 그 어떤 정성들을 표시할 때가 아닌가 생각되었다.
具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