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삼스럽게 갈릴레오는 왜 들추어 내느냐고는 안하시겠지요. 지난번에 교황 바오로 6세께서 「人間의 生命」이라는 회칙으로써 人口問題 또는 産兒問題에 대해서 교회의 傳統的인 原理를 明白히 했을때 世界의 여러 곳에서 이것은 갈릴레오 事件과 같은 誤謬를 교황이 犯하는 것이 아니냐는 反對 의견이 「매스콤」을 통해서 널리 報道된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 까닭입니다. 그러니까 「갈릴레오 事件」 自體를 얘기하려는 것이 아니고 갈릴레오를 관련시키게 된 산아문제가 關心거리입니다. 우리가 常識的으로 모두 알고 있는바와 같이 「갈릴레오 事件」이라는 것은 이제는 完全히 一段落한 것이지만 오랫동안 이것은 마치 宗敎的道理와 科學的 眞理는 兩立할 수없는 것같이 생각하고 나아가서는 宗敎는 非科學的이라고까지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敎會는 쓸데없이 전통과 권위를 내세우고 學問의 自由를 抑壓하고 科學의 發展을 막는 것이라는 印像을 많은 사람들에게 주어왔던 것은 참으로 유감이었읍니다. 더우기 이것으로 교황의 無謬權까지 攻擊하려고도 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이것은 科學에 關한 일이고 敎理에 관한 일이 아니라는 것은 明白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사이에 彼此間에 어떠한 混同이 있었던 것은 事實인것 같읍니다. 護敎라는것은 잘못을 擁護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最高의 護敎는 잘못을 잘못이라고 認定하는 것이라는 마리땡의 말이 생각납니다. 요즘 와서는, 그 당시의 敎會의 指導者들이 어떤 点에 있어서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公的으로 認定하게 된 것은 참으로 잘된 것입니다. 잘못된 것을 옹호하려면 점점 더 새로운 잘못을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그 당시 一般의 自然科學에 對한 상식의 狀態에서 볼 때 「地動說」을 갑작스럽게 받아들여서 혼란을 惹起하고實質的으로 信心을 害롭게한다는 것은 참으로 重大한 問題였을 것입니다. 아무튼 갈릴레오의 事件이라는 것은 커다란 事件이었읍니다.
그런데 한가지 注目해야할 点은 갈릴레오는 요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같은 經驗論者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經驗論이라는 것은 極端으로가면 懷疑主義에 빠지지 않을 수없는 것이며 따라서 普遍的인 眞理를 否定ᆞ하게되는 것이니 잘해야 相對主義的인 眞理밖에는 認定하지 않는 立場에서는 것이 아니겠읍니까. 그러나 갈릴레오는 그런 사람이 아니고 오히려 그 反對되는 사람이고 信念에 사는 사람이며 眞理를 主張하고 知性을 過信하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萬人이 일치하는 現象에 대하여 우리는 그 經驗의 참됨을 確認하거나 또는 그 거짓됨을 밝히기 위하여 理性을 앞장세우고 나간다』고 하는 갈릴레오의 말을 보아도 알 수 있읍니다. 그는 眞理에 대해서 비겁한 사람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그런데 現代人들은 이와는 다릅니다. 그뿐 아니라 7世紀에는 한사람의 갈릴레오가 있었는데 요즘은 갈릴레오가 數없이 많은 것 같읍니다. 萬人의 反對를 무릅쓰고 眞理를 主張하던 갈릴레오에 對해서 萬人의 뒷전에서 德을 보려는 갈릴레오 말입니다.
朴甲成(西江大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