泰國 香港을 돌아 臺灣서 2泊 하고 지금 日本을 향해 비행중에 있다. 태국은 불교나라로 王宮과 寺刹이 붙어있었고 또 절마다 학교가 있었다. 祭政一致랄까! 국민의 98%가 그 신도란다.
성당은 찾지 못했고 어느 외국 수녀회가 경영한다는 여학교를 지나치다 들여다 보았다.
이 학교는 首都 「방콕」에서도 一流라 한다. 우리가 흔히 南方이라면 웃통도 맨발도 벗은 사람들을 상상하지만 여기는 여학생들은 물론 남학생들까지도 교복을 단정히 입고 양말과 구두를 신고들 있다. 농촌사정은 가보지 않아 모르지만 「방콕」은 우리 서울보다 훨씬 서구적인 근대도시로 시가 계획도 잘되고 시민생활도 윤택하게 보였다. 이번 나와 특히 느낀 일이지만 우리들이 막연하게 東南亞에선 일본 다음엔 우리가 나은 편이겠지 하는 慢心은 그야말로 우물안의 개구리 같은 생각으로 태국만 하더라도 그들은 아세아서 남의 나라의 被支配國이 되지 않은 나라는 일본과 자기들 뿐이요 경제적으로도 中進國이라는 자부를 갖고 있었다.
또한 우리가 우리의 고적과 名勝들을 자랑하지만 태국의 古代佛塔들이나 臺灣의 孫文博物館을 보고는 우리의 貧像을 차탄케 하였다. 거기다가 그나마의 保存維持나 名勝의 觀光설비 등을 對比하여 보고는 스스로 부끄러울 뿐이었다.
비록 우리와 신앙의 대상은 다르나 각 민족이 제나름대로 곳곳에서 祈禱하는 모습을 接할 때는 마음에 따스함을 느꼈다. 더우기나 외국 성당에서 낯서른 사람들과 나란히 제대 앞에 꿇었을 때 그 감동과 기쁨은 가톨릭신자가 아니고는 맛볼 수 없는 것이리라.
지난 주일 台平에서는 호텔 근처인 長安성당에서 미사를 참예했다. 우리 서울 世宗路 성당쯤 될 것이다.
여기도 새 예절의 익숙度가 우리 정도인 것이 친근감을 더 해주었고 天井이나 燈皮 등을 중국 고유의 장식을 한 것이 눈에 띄었다.
「東西의 彼岸」으로 우리나라에 알려진 吳經態 박사를 輔仁大學으로 찾앗으나 미국에 가셨다는 이야기다. 이 「유니크」한 碩學을 만나는 것이 나의 臺灣 방문의 즐거움의 하나였는데 또한 우리 四會(在俗修道會인 第三會에 견주어 말하는 弄言) 院長인 金益鎭 선생께 보고할 큰 선물이었는데 매우 섭섭했다.
우리는 한나절을 孫文博物館에서 보냈다. 여기엔 중국의 古代美術品이 30만점이나 되어서 一時陳列을 못하고 四季로 交替하여가며 展示한다는 이야기다. 이것을 蔣介石 政權이 臺灣으로 망명할 때 운반하였는데 현 박물관장은 여러차례 비행기로 나르면서 끝내 가족은 못데리고 나왔다는 것이다. 우리는 동란때 文化財는 커녕 어느 관리는 자기집 장작 나르기에 열을 올렸다는 이야기와는 對照的이다. 나는 거창하다는 표현 밖에는 더 다른 賞嘆의 말이 안나오는 珍奇의 더미 속에서 중국은 역시 大國이라는 느낌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할때면 더욱 느끼는 것은 우주의 無邊廣大와 자기자신의 倭少다. 그 옛날 「바벨」塔을 쌓던 사람들의 짓은 역시 땅위를 것기만 하던 시대의 인간의 어리석음이다.
하늘과 바다가 맞붙은 太白의 허공 속을 가노라면 파스칼이 말한 우주의 그 침묵이 정녕 두렵다.
이제 머지않아 日本 땅이라는 「아나운스」가 들려온다.
具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