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참례를 하다가도 문득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信德이 오죽하면 그럴까 싶지만 숨김없는 얘기다. 이런때일수록 마음은 聖堂밖에 가 있다.
풍금소리나 요란해야 번쩍 정신이 차려진다. 비로소 그 講論이 끝난 것이다. 언젠가는 M聖堂에서 靑年神父가 『人生의 更年期』에 관해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속으로 苦笑를 금치 못한 적이 있었다. 그 미사에 참례한 敎友들의 平均年齡을 재어보아도 30은 넘었을만한 자리었다. 司祭라고 「更年期」를 말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司祭일수록 권태에 얽매인 사람들을 일깨워 人生의 보람으로 채워 주어야 할 것이다. 問題는 說得力이다.
說得力 얘기가 났으니 하는 말이지만 日曜日 아침 때때로 AFKN 放送이라도 틀게되면 美軍軍牧神父의 강론을 들려줄때가 있다. 그 힘찬 억양하며 誠實性하며 진지하게 남을 흔들어 깨워주는 청량제가 있다. 新敎쪽의 이름있는 說敎師긴 하지만 빌리 그램의 그 파도같은 論調 · 狂信的인 熱性의 음성 그 불꽃 튕기는 「제스처」는 그런대로 一理가 있다고 생각된다. 論調는 고사하고 억양마저 꽉 닫힌, 그래서 조으는듯 마는듯한 목소리로 어물어물하고 마는 講論에 부닥치고 보면 미사는 지루해지고 마음은 聖堂 밖으로 도망을 간다. 조그만 聖堂에 「마이크」가 있을리 없다. 司祭의 講論은 불과 서너명의 구에나 들릴지 하는 목소리로 계속된다. 그새 아이들은 왁자지껄하고 뒤에선 슬그머니 졸음까지 오는 것이다. 믿음이 부족한 탓인가. 믿음만 强하면 이런것은 克服되는 것인가.
司祭라는 말(PRIEST)의 근원은 「長老」에서 연유한다. 「長老」는 新約時代엔 끊임없이 群衆들을 깨우치고 說服하여 天國의 영원한 즐거움을 일러주는 글자 그대로의 長老였다. 늙었다는 뜻의 젊은이, 아니 누구보다도 많은 體驗과 眞理를 터득하고 있다는 意味와 통한다. 그것은 곧 司祭의 役割과도 一致하는 것이다. 司祭는 자신의 信德만으로 福音을 傳達할 수는 없다. 그것도 중요한 구실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것 못지 않게 罪人들을 說服시키며 理解시켜 理性있는 信仰을 갖게 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神學校課程 속에는 講論도 들어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지금같은 뜨뜻미지근한 訓練만으로 오늘의 분망하고 茫然自失한 群衆들을 이끌 수는 없다.
崔鍾律(月刊中央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