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 지난호 畵報에 재미있는(?) 記事가 하나 있다. 「워싱턴」 어떤 성전에서 한 추기경이 산제회칙에 순명할 것을 促求하는 교황의 사목서한을 읽기시작하자 2백여명의 신자들이 일단 退場, 서한낭독이 끝나자 다시 성당으로 들어왔다는 얘기다. ▲그들은 물론 神을 믿고 神을 사랑하기위해 모인 천주의 백성이다. 문제는 바로 그 점에 있다. 그것은 神은 믿지만. 神이 地上에서의 全權을 맡긴 그 으뜸사도의 후계자인 교종의 말은 믿지 않겠다는 공공연한 의사표명이기 때문이다. 신앙의 본질이 무구하고 單純한 믿음내지 純一한 神에의 歸依에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과연 그들의 태도에 異狀은 없는 것일까? ▲좀 다른 얘기지만 某대교구의 시복경축대미사장에서도 재미(?) 있는 일이 속속 눈에 띄인다. 수천신자들이 모여, 겉으로 보기엔 대성황이었는데 영성체가 시작되자 列이 술렁술렁 동요하더니 많은 사람들이 퇴장한다. 어떤 사람들은 한술 더 떠서 『아이구 이게 얼마만이냐』고 야단법석을 하며 악수를 한다. 아직도 한창 미사를 드리고 있는 중인데, 제자리에 서서 경문을 외우고 있는 사람과 자기들은 마치 서로 다른 神을 믿고 있기나 한듯한 표정으로 어정어정 걸어 나오면서 말이다. ▲미사시간이 길기도 했고 햇볕이 몹씨 따갑기도 했지만, 「워싱턴」 얘기와 이것이 하기야 똑같은 성질의 것은 아닐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하나의 공통점은 있는 것 같다. 무언가 우리는 너무 安易하게 스스로의 本性과 妥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극히 利己的인 自己寵愛에 빠져 있으면서 신을 사랑하는 듯 착각하고 있는 신자는 없을까? 혹은 스스로의 인간적 本能에 달콤한 現代神(?)을 不知중에 창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믿고」 걷느냐, 일상의 諸정세를 「보고」 걷느냐에 따라 人生은 아주 다른 모습을 보인다고 힐티는 말했다. 물론 「믿고」 걷기 위해선 얼마나 숱한 俗生活 속에서의 희생을 치루지 않으면 안 될 것인가를 몰라서 한소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끊임없이 다가오는 무수한 어려움과 고통을 극복하지 않고서 어떻게 永福의 彼岸으로 갈 꿈을 꿀수 있겠는가. ▲문득 칼디날 쉬아르의 말이 떠오른다. 『우리는 人間을 神에게 接木해야지 神을 人間에게 接木해선 안된다.』 그리스도신자라면 이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