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을 기해서 우리나라에 24位의 福者가 새로 나신 것은 우리들의 큰 기쁨입니다. 백여년전에는 무섭고 슬펐던 일이 지금에 와서는 영광과 기쁨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天主學徒들을 根絕시키려고했던 일이 오히려 커다란 勝利로 反轉된 것입니다. 人間은 이렇게 우둔한 것입니다. 本來 이렇게 愚純하기때문에 예지가 必要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人間은 歷史的 動物이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歷史를 通해서 밖에는 眞理를 참으로 實現시키지 못하고 있읍니다. 『우리는 過誤를 犯함으로써 밖에는 天主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다』는 뽈·끌로델의 말도 이러한 뜻일 것입니다. 異敎徒의 눈에는 우리들이 하는 짓이 모두 어리석게 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또한 天主의 눈앞에도 지극히 어리석은 存在일 것은 틀림없는 事實입니다. 天主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할때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天主께서도 歷史라는 時間을 주신 것이고 歷史를 通해서 우리가 眞理에 도달하고 理解하도록 안배하시는 것이며 그것을 기다리고 歷史와 함께 우리들사이에 계시는 것이 아니겠읍니까. 이것이 바로 歷史의 뜻이며 이러한 眞理가 없다면 歷史라는 것은 空虛한 것일 뿐아니라 고통의 바다 눈물의 꼴짜기에 그칠 것입니다. 만일 이러한 뜻없이 이것이 無限히 繼續되는 發展過程이라고 한다면 그보다 더 지겨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殉敎者들의 子孫들이니까 殉敎精神을 본받아야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殉敎精神을 살리는 것인가 하고 反省해보지 않는 信者들도 드물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생각을 간추려볼 때 結局은 우리들 모두가 어떠한 意味에서 殉敎 或은 致命과 通하는 生活에 參與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歷史라는것은 所謂 歷史的인 大事件을 줄거리로 하는 것이며 그것은 氷山의 一角에 不過한 것이요 그 背後에 보이지 않는 無數한 事件들이 있는 것이 아니겠읍니까.
天主께서만 아시고 天使도 惡魔도 豫測할 수없는 良心의 秘密과 苦痛이 엉켜있다는 것, 더구나 人間의 어리석은 눈에는 가리어진 일들이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런 点에서 殉敎者들의 日常生活과 우리들의 日常生活은 共通点을 가지고 있읍니다. 우리들에게 크게 보이는 것이 天主께도 반드시 큰 것이 아니요 우리들 눈에 些少한 것이 天主의 눈에도 반드시 그런 것이 아닐 것입 니다.
韓國天主敎史에 빛나는 79位 福者와 이번에 새로운 榮光에 빛나는 24位 福者의 背後에는 殉教한 또는 殉敎하지 못한 無數한 「無名勇士」들이 있다는 事實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며 萬一 이 無名勇士의 뜻을 充分히 살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世俗的인 眼目으로 밖에는 世界를 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겠읍니다. 지난번에 어떤 軍宗神父 한분이 主日미사에서 이런 강론을 하는 것을 들었읍니다.
『軍人들을 위해서 일을 할래도 아무런 支援도 없으니 聖人이 아닌 나로서는 일할 수 없으니…』.
當然한 말씀이지만 여기에서 「聖人」이 아니라고 斷定하는 것은 옳지 못한 觀念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되었읍니다. 勿論 살아있는 사람을 羅馬 敎皇께서 聖人品에 올릴理도 없겠지만 旣成品같은 聖人이 있는 것도 아닐 것이며 世界史에 빛나는 聖人만 聖人으로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無名勇士, 無名福者, 無名聖人의 뜻을 消極的으로만 생각한다면 信仰生活이나 福者 聖人들의 뜻도 俗된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朴甲成(西江大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