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書齋)의 따뜻한 아랫목이 있으므로 겨울은 한없이 즐거운 계절이다. 라면, 지나치게 서생(書生)적인 냄새를 풍기게 되지만 내게 있어서는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외계가 추위와 얼음으로 저장된 벽(壁)을 이룰수록 누구나 가슴에 뛰는 심장의 뜨거움을 의식하게 될 것이다. 참으로 콧구멍이 바싹바싹 어는 혹한 속에서만 우리는 그 자신의 체온에 의존하게 되고 따뜻한 핏줄을 선명하게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생명이라는 것에 대한 자각과 산다는 것의 갸륵하고도 측은한 사실에 눈이 뜨는 일이며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나 좀 더 <정신적인 존재>가 된다.
이런 날 나는 서재의 따뜻한 아랫목에 파묻혀 흐뭇한 즐거움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하루종일 원고지를 펴놓고 그것과 마주앉아 내면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표출하는 작업에 골몰하여도 싫증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겨울의 서재 속에서는 아침과 저녁의 구분이 없고 오늘과 내일의 한계가 없다. 햇볕이 서리지 않는 흐린 날은 내면과의 대화가 이루어지기에 가장 적합한 자연의 조명(照明)이 아늑하게 마련된다 이 밝지도 어둡지도 않는 미명(未明) 속에서 나는 지난 날을 회상하고 앞날을 생각하며 상상의 크낙한 날개를 펴고 마음이 내키는대로 나 자신의 세곗 속에 침잠할 수 있다. 때로는 이와같은 침잠과 작업에도 지치면 혼자 차를 끓여 마시게 된다.
종일 내면을 응시한 눈을 들어, 눈이 올듯한 하늘을 창 밖으로 바라다 보며 한 잔의 향기로운 차를 드는 그 충만감. 그것은 서재에 깊이 파묻혀 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즐거운 순간이기도 하다.
혹은 집필(執筆)로 밤을 밝힌 새벽에 창마다 성애가 섬세하게 아름다운 커튼을 내린 방 안에서 한 잔의 커피를 드는 그 황홀한 피로.
일 전에는 어느 친구가 화분을 보내왔다. 무슨 꽃일까. 나 자신도 이름조차 모르는 꽃이 진홍빛으로 피어있는 화분이었다. 겨울의 삭막한 서재 안에서 그 꽃은 너무나 연연하고 너무나 자극적인 것이었다.
집필을 하다말고 혹은 독서를 하다말고 나의 눈길은 무시로 그꽃에 머물게 된다. 그때마다 꽃이 이처럼 귀하고도 아름다운 것임을 나는 새삼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그것을 에워싼 외계가 눈이 허옇게 덮인 산이나 들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마다 이 한 송이 연연한 꽃이 아름답기보다는 오히려 처절한 느낌을 주었다. 그 불 붙는 진홍빛 꽃송이가 숨쉬는 생명의 상징적인 화신으로서 그것이 책상 앞에 군림해 있는 한 이미 봄은 내 안에 살아있는 것이라 여겨졌다.
겨울의 서재 - 그것은 나의 내면세계 속에 밝혀진 등불이요 또한 등불의 따뜻한 불끼처럼 나의 영혼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아늑한 세계이다.
朴木月(詩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