敎會에 나가보아도 소용없더라. 敎會에 熱心히 다니는 信者들도 별수 없더라. 이러한 말을 들을 때 또는 그러한 말을 들을만한 事實이 있을 때 참으로 마음이 아프지 않은 신자는 없을 것입니다. 그저 對答할말이 없고 얼굴만 화끈거리게 되는 것입니다. 護敎라는 것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이 아니라 事實을 事實대로 認定하는 것이 最上의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장 좋은 布敎方法은 좋은 표양밖에 없는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번에 24位福者의 諡福式때 西歐人들은 東洋의 좋은 표양을 본받아야한다고 敎皇이 말씀한 것은 우리 福者에게 대한 最大의 讚辭라고 들어야할 것입니다. 反面에 信者도 별수 없더라, 神父도 별수 없더라하는 말을 우리가 만일 듣는다면 이것은 最大의 批判이며 우리들의 가장 큰 弱点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다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自身의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거룩하고 공번된 敎會를 믿으며」 이 敎會는 우리들의 모든 弱点에도 不拘하고 그 聖性에 變動이 없다는 것을 그들에게도 알려야 하겠읍니다. 부끄럽다는 것은 우리가 殉敎福者들 같지 못하기 때문이며 우리가 聖會를 信仰하고 있다는 것은 「별수 없다」는 체념이나 絶望이아닌 無限한 希望에 歡喜의 根源이되는 까닭입니다. 우리는 결코 人間의 弱点을 否定하거나 그것을 擁護하여 正當化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려는 것은 『별수 없다』는 생각에 있는 것이 아닌가합니다.
그것은 自然만을 認定하고 모든 것을 地上에 局限시키려는 態度입니다.
敎會는 自然을 否定하거나 좋은 文化를 拒否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保護하고 올바르게 育成한다는 것은 두말할 必要조차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自然에만 局限하고 文化속에 吸收되어버리는 것이 敎會는 아닙니다. 敎會가 道德을 保護하고 그것을 完成하는 일을 하지만, 敎會가 道德의 道具만은 아니며 修養하는 道場에 그치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道學者的인 생각이며 「스토아」學的인 主張일 것입니다. 敎會가 道德의 手段이 아니라 反對로 道德이 敎會 或은 宗敎의 手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꼭 같은 것이 文化에도 해당된다고 생각됩니다. 宗敎에 依하여 文化가 育成되기는 하나 宗敎 文化에 吸收되거나 文化에 還元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올바른 宗敎없는 文化는 항상 誤謬를 犯하는 것이기 때문에 宗敎에 依해서 善導되어야하는 것이기는 하나 宗敎가 文化의 手段이거나 宗敎가 文化에 奉仕하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文化는 언제나 地上의 열매밖에는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文化가 지나치게 地上에 局限될 때 敎會는 그것을 이끌어 올려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諡福紀念講演의 要旨가 대체로 百年前에 天主學이 近代文明 내지는 近代科學, 말하자면 近代化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은 事實이기는 하나 어느 便을 主로 하느냐에 따라 殉敎의 피를 헛되이 받아들이는 結果도 생길 것입니다.
참된 文化는 우리들에게서 原罪의 痕跡을 하나씩 除去하는 것이라고 누구인가가 말했읍니다. 近代文明의 特徵은 이 点에서 본다면 그 使命을 오히려 하나씩 抛棄해가는데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렇게 天主의 제단에 바쳐야할 文化의 열매를 하나씩 둘씩 우리손아귀에서 빼앗기는 동안에 우리는 참으로 살기 어려운 環境, 「별수 없더라」하는 말에 對答하기 힘드는 文化속에 살게 된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文化 致命者들이 많이 생겨야 할 文化迫害時代에 살고 있습니다.
朴甲成(西江大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