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삭전 여류詩人 H씨가 가톨릭에 歸依했다는 소식을 듣고 몇해전 어떤 지방 文學강연에서 씨가 하던 강연내용을 상기했다. 흔히 지방문학강연이 문학소녀나 일부 시골문학호사가들의 작가 實物에 대한 호기심을 풀어주는 「쇼쉽」에 그치기가 고작인데 초라한 단상에서 씨의 강연은 퍽으나 성실하고 진지한 것이어서 감명깊었던 기억이 있다. ▲내용인 즉 모든 人間은 한 성실한 求道者로 저마다의 人生을 탐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는 비록 신앙없는 사람일지라도, 따라서 그 결과가 무엇인지 조차 모르면서도 깜깜한 암야를 끝없이 헤매며 그가 들어갈 문을 찾고 두드리는 것이며 이러므로 인간은 숙명적으로 고독한 존재일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였다. ▲특정한 신앙을 갖지 않더라도 한 詩人이 예술을 通해 人生을 성실하게 궁극적으로 탐구할 때 그것은 肯 · 否定을 막론하고 결국 신이라든가 신앙이라든가 하는 인간 구원적인 문제의식에 귀착않을 수 없다는 느낌이다. ▲外信에 의하면 미국의 有數한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 역시 가톨릭에 入門했다.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를 비롯, 우리나라에도 그의 작품이 여러편 영화로 소개되었다. 이러한 영화를 통해 보더라도 그의 작품 속엔 인간의 불가항력적인 비근, 즉 근원적인 處斷(原罪) 같은 것을 엿볼 수 있다. 영화 「雨愁」 원명 「차압된 재산」에서도 여주인공 에바(여明)는 그녀의 유리공 같이 무구하고 아름다운 꿈을 안고 행복을 추구하지만 끈덕진 운명의 훼방꾼에 의해 끝내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러면서도 마지막 혜허의 철로변에 혼자남은 에바의 여동생을 통해서 오히려 거기엔 꺼지지 않는 인간의 꿈이 어딘지 영원으로 통하리라는 그런 여운이 감돌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상기한 작가들의 신앙귀의는 어떤 필연적인 귀결이란 느낌이 없지 않다. ▲그러면 일단 작가가 신앙을 가질 때 다시는 어떤 迷惑이나 모순이나 장애도 없이 기정된 궤도위에서 창작에 매진할 수 있을까? 『완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존재하지 않는한 모든 인간은 어떤 의미로 절망과 불안을 갖고있다』는 말이 있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그리스도인은 존재치 않으며 오히려 보다 그리스도적이고자 할때 우리는 더욱더 인간적인 곤혹을 면치 못하며 따라서 그리스도교 작가가 추구할 과제는 보다 영원하고 끝없는 것이 아닐까. 즉 그는 바로 신과 마주 대결함으로써 신의 무진장한 섭리의 迷惑 속에 참담한 求道의 참험을 겪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신아으이 곤혹을 어떤 시인은 이렇게 읊었다. 『내 영혼은 눈먼 나비런가. 정처없이 하늘하늘 헤매다. 오, 오, 虛無와 無明과의 조우… 날이면 날마다 지쳐서 돌아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