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세계에 적응하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노력이 우리나라서도 조속히 이뤄지기를 기대해온 이때 , 공동노력을 위한 「키포인트」를 모색하려는 첫번째의 주교 선교회 및 수도회 장상회의가 대화의 「무드」를 조성하고 형제애를 깊이하는데 성공했다는 보도는 여간 기쁜일이 아닌줄 안다.
지난 21일부터 23일까지 연3일간 서강대학서 열린 회의가 당초 상정했던 수개의 의제를 모두 심의못하고 첫 의제인 「공동사목과제」만은 논의하고 그쳤으나 공동사목을 위해 온갖 방법의 협력을 아까지 않겠다는 합의는 오늘날 교회가 처한 제정세나 환경 및 관제아래서는 긴요한 것인줄 확신한다.
제2차 「바티깐」 공의회를 통해 성신께서 주신 성총중 그 으뜸의 하나가 바로 이 「공동성」이기 때문이다.
폐쇄적이고 배타적이었던 지난날의 교회상을 탈피하는 「모멘트」를 마련한 역사적 공의회 후 오늘 상당한 신학적 및 신앙상의 혼란을 겪고있고 교황 바오로 6세께서 작년에 발표한 「신앙고백」 혹은 산아제한에 관한 「인간의 생명」 회칙 후 또는 「화란교리서」가 제시한 소위 신학이나 사제 독신제 등으로 여간 혼란을 거듭하지 않고 있는 이때, 그리스도를 대리하여 사목에 임하는 주교님 등 고위 성직자의 고충이 여간 아님을 충분히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십자가의 길은 공의회가 소집된 바로 첫째 이유였고 진정한 각성과 쇄시을 위해 필요한 진통임을 또한 간과해서는 안될줄 안다. 다시말해서 이같은 진통은 스스로가 자초했고 각오한 것이다. 그러므로 각성과 쇄신을 위해 각오를 새롭혀야 하되 신념을 상실하지 말아야 겠다.
모는 수술에 있어 무엇보다 형제애와 침착성을 잃어서는 안되며 위선을 배제해야 한다. 즉 「성실」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과정에서 「관용」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이 모든 것은 오직 효율적 선교나 선교에 임하는 자세일 것이다. 이 기회에 바른 각성과 쇄신을 위해 그리고 주교님들의 사목에 기여하기 위해 현대에 처한 우리를 반성해 보고자 한다.
우리가 생활하는 현대는 세속주의 · 인간주의 · 무신론적 물질주의의 영향하에 있음은 너무도 많이 이야기 했었으나 어떻게 그것에 대처해야 할 것인지는 한번도 논의한 적이 없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신념을 상실하고 비겁항며 목적의식이나 사명감에 투철하지 못할뿐 아니라 자기규정도 제대로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자기규정의 미흡은 바로 「한국에는 신학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西歐의 소위 공의회 후의 과도기적 혼란상은 신념의 갈등인데 반해 한국의 그것은 무지의 혼돈인줄 안다.
우리는 흔히 『천주교신자들이 더 나쁜 짓 잘한다』는 말이나 종교의 너울을 쓰고 위선에 가득차 있다는 비평을 듣고 있다.
조국과 겨레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려는 우리의 힘은 지리멸렬해 있다. 주교는 신부를, 신부는 신자를 백안시 하거나 심지어 적대시 하고 있지는 않은가?
비오 12세께서 하신 말씀처럼 「평신자들을 성인으로 평가, 예우하지 않고 벙어리 같은 노예노릇」을 이상더 하지 않게 해야할 줄 안다. 교회 전체를 위한 계획이나 연구 · 논의가 몇사람만의 이익인양 비밀에 붙여지고 숙덕공론만 하는 예가 비일비재했다. 이런 판국에서 참여의식을 바랄 수는 없다. 맹종을 기대하는 지도자만큼 어리석은 자는 없다. 비평이 지나쳤다 하여 이성을 상실하리만치 분노하고 성직자의 「스캔달」을 감추기 위해 유형 무형의 많은 교회이익에 손실을 끼쳤는가 하면 성실만을 강조한 나머지 성실을 과신함으로 초래한 소실도 적지않다.
한편 평신자들은 어떤가? 교리지식이나 신앙의 깊이에 있어서 후진교회 신자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유년생이면서 공의회에 힘입어 공의회 정신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비평을 위한 비평만을 일삼고 사도로서 갖추고 배워야 할 의무는 소홀히 하며 세속주의 풍조에 동화되어 안일만을 일삼고 교회의 부르짖음을 외면하거나 무관심한채 있다. 우리는 「하느님의 한 백성」이며 「대접」을 받을 자가 아니요 「봉사」할 역군들임을 명심해야겠다. 우리는 지금 당장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다.
지금은 시기나 대립의 때가 아니요 사랑으로 뭉쳐야 할 때다. 사제나 신자 할 것 없이 지난날의 「나」를 겸허하게 반성해야 할 때다.
훌륭한 「복음의 교사」 되기위해 성직자나 신자를 막론하고 새로 배워야 한다. 나아가서 우리나름의 신학을 가져야 한다. 경제개발과 근대화를 향한 조국발전의 진로가 「매카니즘」에만 치우치는 현실을 구해야 한다.
지난 20여년간 주교님들은 유능한 인재들을 구미에서 수학케 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훌륭한 인재들을 가졌으며 80만이나 되는 대식구다.
이런 판국에 이번 회의가 상정한 안건 모두를 심의못햇으나 사목을 위한 근본적 합의에 이르러 사목전반을 검토 · 연구할 실질적전문기구를 세우고 전문가들의 보필을 받고 상기한 결점 · 과오를 극복하고 구원의 교회답게 총체적인 노력에 임하게 된것을 경하해 마지 않는다.
이번 모임을 계기로 되찾은 형제애에 힘입어 주교 및 장상들은 신념과 계획대로 현실앞에 앞장서 주길 바란다. 지도력을 강력히 그리고 바르게 발휘하도록 성신께서 도우시길 기원해 마지 않는다. 이같이 지도체계가 확립될 마당에 신부나 신자들은 교회내의 유일한 스승인 주교님들을 모시고 하나로 뭉쳐 성실하고 힘찬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어 복음 전파에 진력해야 할 것이다. 이같은 노력이 바로 휴율적 선교의 길이요 당면한 사목과제인 신앙과 교리를 심화하는 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