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다시 찾아들고 그 色調가 날로 짙어감에 따라 마치 禁婚令이라도 풀린 듯이 京鄉到處에서 婚姻聖事가 연방 擧行되고 많은 젊은 男女들은 짝지어 새家庭을 꾸미기에 한창 바빠졌다. 慶事스러운 人倫大事의 儀式이 和暢하고 아름다운 季節에 舉行됨은 當然한 일이다. 이 結婚의 季節을 맞아 우리는 아름답고 健全한 그리스도敎的 家庭生活의 始發点이 되는 婚姻에 대하여 特히 젊은이들의 올바른 認識과 覺醒을 促求하는 바이다.
오늘날 婚姻에 대한 觀念이 너무나 通俗化되어 하나의 社會慣習的인 契約으로 化해가는 傾向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氣勢에 휩쓸려 우리 信者 역시 婚姻聖事를 聖堂에서 맺어지는 男女의 契約 程度로 생각하여 內實 보다도 外飾에 힘을 기울이는 印象마저 주고 있는 實情이고 聖堂은 平凡한 禮式場으로 轉落되어가고 있는 느낌 또한 없지 않다.
婚姻은 단순한 法的契約 以上의 것이다. 第2次 「바티깐」 公議會는 司牧憲章에서 婚姻이 「契約」 또는 「契約上의 合意」라는 表現을 굳이 避하고 그 대신에 「取消할 수없는 人格的 合意에 의한 夫婦間의 誓約」(48項)이라는 表現을 決定的으로 擇하고 있다. 責任性있는 人格者가 되어야 婚姻할 수 있다는 말이다. 果然 婚姻은 肉體的이요, 心理的인 成熟뿐만 아니라 敎會의 浪漫的 現實主義를 理解할만한 人格的, 靈神的인 成熟을 또한 要求하고 있는 것이다.
敎會는 지극히 浪灣的이어서 사랑의 노래들을 진지한 態度로 對하고 사랑하는 男女들의 對話를 正色으로 다룬다. 사랑의 노래들은 예나지금이나 한결같이 永遠한 사람 不斷한 사랑 忠實한 사람을 노래한다. 여기에서 우리敎會는 世上의 모든 사랑의 노래와 一致한다. 敎會는 사랑의 死滅할 수없는 性格을 至當한 것으로 認定하고 永遠의 言語를 사용하는 사랑을 가르치는 것이며 따라서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持續되지 못하는 사랑은 사랑의 「카리카츄어」로써 그것을 排擊하는 것이다. 婚姻禮式에 있어서도 敎會는 대단한 낭만을 보여 모든 愛人들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 儀式을 다정스레 마련해 준다.
그러나 한편 敎會는 매우 現實的이어서 結婚이 人力으로만은 到底히 풀 수 없는 未知의 方程式임을 使徒 바오로의 말대로 하느님께 愛着하는 者만이 洞察할 수 있는 「하나의 偉大한 神秘」임을 가르치는 것이다. 敎會는 「달빛과 장미」의 生涯를 約束해주지도 않고 구름끼지 않은 날이나 잔잔한 물결 같은 人生을 保證해주지도 않는다. 그는 婚姻이 幸福의 膽物이라고 말하지 않고 다만 愛人들이 實現해야 할 幸福의 機會가 된다고 主張할 뿐이다. 그리스도는 참으로 偉大한 愛人이었고 그분의 十字架는 바로 그 사랑의 證據인 것이다. 敎會는 지극히 當然하게도 自己子女들이 스승이신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犧牲이란 것이 사랑의 試金石임을 기억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우리는 婚姻을 앞둔 젊은 信者들이 十字架로써 象徵되는 靈性의 深奧한 精神과 意味를 理解하고 具現하여 福된 家庭을 이룩하기를 바라마지 않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