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철 나의 조그만 冷房서재 - 문득 몇해전 내가 찾아가 한여름을 즐겼던 어느 조촐한 海水浴場을 연상한다. 그 욕장은 규모가 그리 크지 않고 施設도 자못 빈약했으나 유난한 경치로 꽤 많은 피서객들이 한 여름 盛市의 「붐」을 이루었었다. 날씨가 선선해져서 내가 그 海岸을 떠나 서울로 올라오던 날 나는 무득 그 욕장의 겨울풍경을 想像해 보고 쓸쓸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 이 해안의 겨울풍경은 어떠할꼬? 이많은 남녀들 『都市 重役들의 副子들과 「님프」들이 모두 떠나간』뒤, 이 쓸쓸한 해안에는 의구히 밀물만이 드나들고, 잔 물결이 바위에 찰삭대고, 漁船이 드문드문 寄港하고, 갈매기가 언(凍) 날개를 펴며 날아들고, 施設만이 그대로 鎭坐해 있을 뿐이겠지… 한여름 그리도 번창했던 이 浴場이 겨울이면.
청춘도 그렇고, 인류의 역사의 轉變도 그렇고, 내 서재의 지금 겨울 풍경도 그렇고….
2층 北편 방, 멀리 北岳의 最高峰이 바라보이는 「望獄」이라 扁한 내 조그만 서재는 몇10년래 해마다 봄 · 여름 · 가을동안 그 서늘한 환경으로 그 알찬 藏書로, 내 讀書와 硏究의 「場」으로서 참으로 조촐하고 훌륭한 향락터였다. 그러나 겨울이 되자 나는 暖房장치가 없는 그 서재로부터 아랫층 온돌방으로 내 坐臥의 곳을 옮겨, 서재는 그만 「겨울의 海水浴場」이 되고 말았다. 이따금 읽을 책, 참고할 典籍을 가져오러 잠깐 올라가볼 뿐이요, 서재는 늘 덩그렇게 비어있어 책장 · 책선반 위의 책들과 壁위의 편 額(院堂)만이 쓸쓸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을뿐 - 完然히 겨울 海岸의 풍경 바로 그대로이다.
그러나 『겨울이 로면 봄인들 어이 까마득하리?』(셀리). 이윽고 새봄이 오려한다. 여름도 고대뢰라. 내 서재도 미구에 다시 번화한 「場」이 되어 내 독서와 硏學의 고마운 便宜를 제공하고 내 사랑을 독차지할 날도 멀지는 않으리라 - 내 사랑하는 알찬 조촐 · 오붓한 서재…
하자로서 무엇보다도 「藏書」가 자랑임은 당연하고 떳떳한 일이다. 대개 藏書의 「富」와 「貴」가 곧 그들의 본질적인 「富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소위 「學人」으로서 이 방면에도 「貧窮」을 면치 못하여 藏書의 量과 質이 「자랑」에 값하는 아무것도 없음을 섭섭히 생각한다. 지금 나의 서재에는 新刊書가 겨우 千책쯤 古書 重刊本이 百종 내외, 珍本 · 국보급 稀구書는 근근 몇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빈약한 서재가 어디 있을까? 그러나 내게는 모두 요긴하고 다정한 책들 - 비록 이 겨울엔 주인 나조차 뜸하게 찾는 「獨守空房」의 색시같은 신세이나, 평생 읽지도 않고 참고도 하지 않는 몇千, 몇萬의 서책을 부질없이 陣列함으로써 自身의 무식을 반대로 「擬裝」하거나 혹은 단순한 「有效한 담벽」을 만드는 저 世俗의 藏書家들의 서재와는 다른 알찬 品位와 권위를 지닌 나의 서재이다.
얼마전 어느 신문社에서 내 「이름」에 先入見 되어 내 「藏書」를 소개코자 기자가 사진班을 帶同하고 내 「서재」를 委訪했다. 내가 모처럼 찾아온 그를 내 「겨울의 海水浴場」으로 인도하니 그들이 그 「施設」(장서)이 뜻밖에 빈약함에 놀란 表情을 했다. 그래 彼我간에 다음과 같은 문답 - 『선생은 그리도 博覽이신데 책은 다 어디두었읍니까?』
『모두 이 뱃속에 들어있죠.』
중국 古俗에 7月 7日엔 집집이 옷을 내걸어 말렸었다. 晉代 학륭이 그날 이웃 부잣집에서 능라 금수의 衣裳을 내걸어 말림을 보고 마당의 뜨건 햇볕에 나가 배(腹)를 드러내고 누워있었다. 누가 그까닭을 물으니, 그의 대답 -
『내 뱃속의 책을 말리는 중이로세.』
내가 이 氏의 口을 본떠 기자氏에게 「解조」 하며 손가락으로 배 「머리」를 가리키기까지 했으나 그가 그리 신통해 하지 않았다. 역시 현대는 晉代가 아니라서 학자에겐 꼭 「근사한 擬裝」 혹은 「유효한 壁」이 필요한 것인가? 혹은 또 때가 워낙 7월의 盛暑가 아닌 겨울철이라서 내 「겨울의 海水浴場」이 실제보다 더 쓸쓸히 보였던 때문일까? 허허.
梁柱東(學術院 종신회원 文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