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졸간에 성큼 다가선 겨울의 입김이 마냥 섬뜩하다. 날씨가 춥지 않아도 이맘때가 되면 주부들은 김장이며 연탄걱정 등으로 가라앉은 잿빛 하늘보다 더욱 스산하게 흐린 얼굴빛이 되곤 한다. 설상가상으로 10%, 15%로 마구 껑충껑충 뛰어오른 연탄값은 더욱 초조로운 불안을 던져주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연간 20억원의 赤字를 내고 있다는 석탄공사가 引上 이틀 전, 50만톤에 달하는 炭을 그것도 외상으로 某種特定業者들에 팔아넘겨 2억5천만원에 달하는 不當利得을 취하게 했다는 事實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獨寡占폭리를 비롯해서 각종 공무원들의 비행·횡령 기사가 신문지상에서 늘 뱅글뱅글 돌고 있는 판국이라 그렇게 鐵面皮한 대활약을 하지 않더라도 국민은 충분히 심심할 여가가 없을 텐데 말이다. 「커미션」에 강아지처럼 침을 흘리며 良心이나 社會正義란 말들 따윈, 완장처럼 한쪽팔에 어줍게 꿰여진채 너무 추워서 심장근처엔 가보지도 못하고 그만 얼어 죽어버렸나 보다. ▲그러나 이런 事態보다 더 낮뜨거운 것은 자칭 종교인들의 良識해결여다. 강연도중 입안에까지 튀어 들어오도록 얼굴과 온 겉옷에 汚物세례를 받은 어느 교수의 얘기도 얘기려니와 某寺 주지의 강제감금 및 소위 「鳴鼓出送」의 축출도 그에 못지않게 아름답지 못하다. 이유야 무어건 또 내부의 알력이 얼마나 熾烈했던 『종교인들도 그 모양이니』식의 한탄을 유발케하는 행위다. 宗敎에 관한限 사회는 어느面에서 항상 높은 요구 수준을 가지고 있어 크든 작든 그것이 종교계 내에서의 분란이라면 생의 終局的 札마저 앗긴듯한 배반감으로 하여 그만큼 더 衝擊을 받기 때문이다. 『태어나자 투기장에 들어가 죽어서야 거기로부터 나오는』 험준한 인생행로에서 종교라는 단 한줄의 빛마저 不信하는 風이 유행하게 된다면 그들은 빠뉘르쥬의 양떼처럼 方向을 상실하고 附和雷動하는 허황한 流浪人들이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아무도 등불을 비추기 위해 다른 등불을 밝히지는 않는 법이다.』 종교란 이름을 쓰고 나타나는 非行에 무관할 수없는 우리는 이런 기회에 좀 더 깊고 총명한 눈으로 교회내의 현실을 正觀하여 敎會現代化가 자칫世俗化로 타락하지는 않고 있는지, 반대로 아직도 봉건주의적 편협함속에서 일보도 전진 못하고 있지는 않는지 등을 반성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드러나지 않는다고 惡이 惡이 아닐 수 없음은 惡은 항상 애매모호한 塗料를 쓰고 우리자신을 기만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