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어느 산골에 백발이 성성한 한 영감님이 살고 있었다. 잠시도 담배를 태우지 않고는 못백이는 지독한 愛煙家지만, 독실한 가톨릭신자기도 했다. 신부님과 한시간쯤 한방에 있는동안 몇번이나 송구스럽고 어줍어하는 표정으로 「뒷간」에 갔다오겠다는 것이었다. 처음 두어번은 그냥 있다가 나중에 문구멍으로 내다본즉 변소앞까지 가서는 급하게 담배쌈지를 꺼내 게걸만난듯 거푸 몇모금 빨고는 점잖게 방쪽으로 걸어오더란다. 새파랗게 젊은 神父라 우습기도 하고 미안키도 해서 방문을 열자 모른척하고 담배를 안대 권했더니 영감님이 펄쩍 뛰면서 『신부님 앞에서 어떻게 담배를 피우겠느냐?』고 하더라는 것. ▲그후에 또 찾아가 이번엔 한시간 이상을 있어도 통 「뒷간」에 가는 기색이 없어 『요즘은 담배 안태세요?』하고 슬쩍 물어본즉, 굵은 주름투성이의 얼굴에 그야말로 어울리지 않는 수줍음을 잔뜩 띄우곤 『봉재시기 아닙니까』 낮게 속삭이더란다. ▲대소재가 대폭 緩和되어 자칫 보속의 眞意마저 흐릿해진듯 느끼는 요즈음의 우리에게 그 순박한 벽촌영감님의 信仰은 생각해 볼 많은 것을 주고있는 것 같다. 그렇듯 素朴하고 單純한 外樣 속에 숨어있는 하나의 自由로운 選拔과 그것을 밀고나가는 보이지않는 鬪爭意志는 어떤 위대한 神學者의 論文보다 실제론 主 앞에 더욱 기꺼운 아름다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四旬節이 目前에 다가든 이때 우리는 雜多한 生活의 쳇바퀴 속에서 찌들어 층층해진 心眼을 닦고, 발가벗긴채 오직 홀로 神 앞에 선 者의 赤裸裸한 孤獨 속에서 스스로의 자세를 自省해봐야겠다. ▲外的인 보속이나 克己가 완화됐다고 해서 무언가가 헐겁게 느껴지거나 解放된듯 느껴진다면 그것은 우리의 信仰이 아직 너무도 下系列的인 低次元에 머물고 있다는 증거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自由가 주어진다는 것은 그만큼 더 內的인 責務가 주어짐을 意味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自由는 神이 人間에게 부여한 가장 高貴한 선물인 동시에 또한 가장 무서운 선물도 되는 것이다. ▲神과 한 인간의 關係가 그 關係만이 가질 수 있는 絶對性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完德에 도달한다는 것은 결국 主 안에서 自己만이 발견할 수 있고 나아갈 수 있는 軌道를 따라 自己 고유의 法則을 實行할 줄 아는 온전한 自由人이 됨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