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9일부터 머리에 재(灰)를 받고 4순절 성업에 들어간다. 4순절은 보속을 통해서 우리가 어느때보다 더 큰 열성으로 인간의 참다운 처지를 묵상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에 전념하면서 「바스카」 신비의 경축을 준비하는 시절이다. 보속은 바깥 표로 드러내어야 할 깊은 내적 뉘우침의 표현이다. 전에는 4순절의 단식이 엄격히 죄스러운 인간처지를 意識할 필요를 설명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이제 「재의 수요일」과 聖金曜日 외에는 단식이 의무적이 아니다. 그리고 벌써 67년부터 재의수요일과 4순절 금요일 외에는 연중 금육할 의무도 없어졌다. 이러한 결정을 내린 동기가 무엇이었나? 「그리스띠아니즘」을 요구가 적은 더 안이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교회법이 완화된 탓인가? 혹 20세기 후반기는 보속을 더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인가? 모든 외부적인 守계는 이제 이제 시대에 뒤떨어진 것인가? 많은 신자들이 수세기동안 이 교회법을 사소한 代價로 지켜왓던가? 아니다. 그것은 신자의 생활, 수계범절, 특히 보속행위가 더 진실한 것이 되기 위해서이다. 교회법의 이 변경은 모든 보속행위가 페지된 것이 아니요 후퇴한 것도 아니요 과거를 부정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앞으로의 새전진이요 진리에 대한 진보요 요구이다. 4순절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보속의 의무는 언제나 또 모든 이를 위해 변함이 없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떤 보속 행위의 필요성이 아니요, 오늘을 위한 구체적인 그 형식이다. 금육 · 단식은 외관상으로는 소극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의 수난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것을 행동으로 구체화한 것이다. 물론 무엇을 포기하나고 할 때 나쁜것을 포기한다는 것만이 아니다. 육식을 한다는 것이 자체에 있어 나쁘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하고 정당한 이것 혹 저것을 자유로이 포기하는데 가치가 있다. 이 자유가 귀중한 것은 구체적이요 실제적이요 인격적인 행동으로 우리가 이세상 사물의 노예가 아니요 하느님께 속하고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변한 것은 금육 · 단식 같은 일률적인 보속행위가 아니고 그 형식이다. 이제부터 이 형식을 각자의 創意力에 맡기고 있다. 전에는 금요일 식사반찬을 위해 물고기를, 단식을 위해 그날 한끼만 먹으면 넉넉했던 것을 이제부터는 그런것으로 표시된 한가지 혹 몇가지 행위를 각자가 찾고 선택해야한다. 물론 금육이나 단식 같은 단순하고 물질적이고 보편적인 법이 더 실천적이고 더 쉬웠다. 이제는 이 보속행위에 창의력을 발휘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를 拘束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볼 때 더 쉽게 되었다. 그러나 자신을, 또 하느님을 속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더 쉽기는 커녕 오히려 더 어렵다고도 볼 수 있다. 그것은 각자가 금육이나 단식 같은 법을 아무런 뜻없이 습관적으로 지키는 대신 자신을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고통을 위한 고통을 혼자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신다. 그는 생명이요 기쁨이요 사랑이시다. 그는 우리의 참된 행복은 우리가 당신을 닮고 당신께까지 도달하는데 있다는 것도 아신다. 그는 우리가 악을 행했을 때 우리가 그 반대의 길을 걷고 멀어진 당신께 사랑을 드러내는 다른 행동을 하도록 원하신다. 이 뉘우침, 이 사랑이 구체적인 형식을 취하지 않는한 그것은 막연하고 진실치 못하다. 우리의 매일의 생활이 희망과 기쁨과 감사에 찬 것이 되어야 한다면 그 생활이 매일 보속적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로부터 구원되었고 그로부터 끊임없이 용서를 받고 있고 우리가 언제나 죄인이므로 다시 돌아와서 용서를 청하여 우리가 천주께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어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