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詩人들은 가끔 「神」에 대한 것을 씁니다. 그들은 「神」을 치켜 올리기도 하고 깎아 내리기도 하고 때로는 「神」을 꾸짖기도 하고 「神」을 저주하기도 하고 조소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所謂 「詩人의 神」이 아닌가 합니다. 이렇게 詩人들은 自己에게 알맞는 「神」을 곧잘 만들어 내는 재주를 가지고 있읍니다. 파스칼은 또한 「哲學者의 神」이란 말을 했는데 哲學者들도 곧잘 「神」을 만들어내는 재주를 가지고 있읍니다.
그런데 古代에 있어서는 「哲學者의 神」은 제법 尊嚴性과 權威를 가졌던 것인데 近代以後로는 차츰 左邊되는 길을 걷기 始作했읍니다. 처음에는 王冠이 벗겨지고 다음에는 안방에서 뒷방으로 몰려나서 천대를 받으면서도 生命은 維持되더니 어느 때엔가는 아주 죽어버렸다는 소식입니다. 哲學者들은 詩人들 보다 훨씬 冷酷하고 徹底한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기막히는 것은 「科學者의 神」일 것입니다. 그것은 그저 「神」이라는 글자하나뿐입니다. 現代에 사는 우리들은 程度의 差는 있을 지라도 누구나 多少間은 이러한 것들에 말려들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信仰은 敎會의 保護를 받아야하는 것이 아니겠읍니까. 敎會를 通해서 牧者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우리들은 그러므로 多幸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眞理속에서 安心하고 잠을 자도 좋다는 것이 아니요 眞理를 盜難당해도 가만두라는 뜻도 아니라고 알고 있읍니다. 敎會는 오늘날까지 熾烈한 戰鬪를 通해서 眞理를 간직해온 것입니다.
知性으로 行動으로 마지막으로는 致命까지하면서 말입니다. 그중에서 가장 큰 武器는 아무래도 哲學과 神學이었을 것입니다. 哲學을 自然을 지키고 神學은 超自然을 지키는 武器였읍니다. 한때 너무도 튼튼하게 城을 높이 쌓았기 때문에 그것을 믿고 잠을 잔일도 있었읍니다. 난데없이 自然科學에게 逆襲을 當한 것이 오늘날까지 混亂이 가시지 않고 있는 實情입니다. 亂世가 되니 武器를 惡用하는 現象이 不知其數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時代는 이렇게 危急한 때라고 보겠읍니다.
우리는 결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게되어 있는 存在가 아닙니다. 무엇인가를 손에 잡고 정신을 차려야할 存在입니다. 近來에는 神學者까지도 敎會內에서 雜音을 이르키고 있는 時代입니다. 지난번에 本紙에 실린 「產兒制限問題의 神學的 考察」인가하는 白씨의 論說에서도 그러한 印像을 받았으며 그 論調는 大衆에게 害毒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되었읍니다. 가령 例를들면 『水道꼭지를 틀면 물은 안나와도 빈소리는 나다』든지 歷代敎皇의 회칙을 간단히 한마디로 『망신스러운 것』이라고 斷定해버린것은 敎皇의 敎導權이나 權威를 어떻게 보고하는 말인지 理解하기 어려운 것이었읍니다.
그뿐 아니라 「自然」이라는 것에 대한 哲學的 見解에가서는 全然納得될 수없는 矛盾을 나타내고 있으며(가령 現代에는 非自然이 自然이라는 등)이러한 問題는 自然科學의 分野이니 科學에 맡기라고 하는 것 등은 甚한 獨斷이라고 아니할 수 없었읍니다. 自然界를 現代의 自然科學者들에게 송두리째 넘겨주라는 哲學은 지극히 疑心스러운 哲學입니다.
이러한 또 이러한 哲學위에 세워지는 新學은 더욱 危險千萬이라고 생각됩니다. 勿論, 神學도 學問인고로 學者와 學者間에 異論도 있고 論爭도 있다는 것을 누가 모르겠읍니까. 그러나 神學專門誌도 아니요 醫學專門誌도 아닌 週刊 「가톨릭시보」에다 아무 꺼리낌없이 性에 關한 것을 露出시킨것은 특히 少年少女讀者에게 민망스러우며 東洋的인 美德에도 어긋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읍니다. 神學者는 哲學者보다는 百倍千倍나 愼重하고 겸허해야 할 것 같습니다.
朴甲成(西江大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