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걸 누가 봤어? 보지도 못한 걸 누가 믿어! 차라리 새끼손구락에 턱을 걸고 그 손톱을 믿으란 말이야!』. 정말 무지막심한 폭언이요, 농(弄)치고는 너무 멋적은 맹꽁이의 농찌께다.
하긴 그런 폭언이나 농지꺼리라도 던질 수 있는 인간이고 보면 아직은 송상이 아닐지도 모르겠구나 싶어서 씁쓸한 안도(?)의 한숨이 질식만은 막아준다. 하지만 그 친구 참 한심하고 답답하다. 아니 살아있는 인간이면 움직이기 마련이고 움직이면 속에 든 것을 털어 놓게 마련인데 자칫하다가 배신여부를 알아낼 심장해부 위촉을 않을까 염려된다. 우리는 지성인이아니라도 보이지 않는 마음을 저울질하는 묘법을 어려서부터 익혀왔다.
아프지 않은 매라도 미워서 때리면 슬퍼했고 보다 아픈 매라도 귀여워서 때리면 참으며 웃어왔다. 슬픔이 가슴에 맺힐 땐 눈물과 푸념으로 보이지 않는 마음을 슬프게 들어 내주었고 벅찬 기쁨이 가슴을 울렁거려줄 때면 참으려 애쓰다가도 변하는 얼굴빛부터 경쾌히 움직이는 사지의 동요때문에 기쁨을 숨길 수가 없었다.
배우지 않고서도 볼 수없는 생명이 가장 귀중한 것임을 알고 있었고 때로는 볼 수없는 사랑때문에 그 귀중한 생명까지도 희생의 제물로 바치는 안타까운 인정을 바라보기도 했다.
못 보는 것이면 믿지 못하겠다고 소리친 방자한 폭언가도 볼 수없는 마음의 결정때문에 볼 수 있는 육체를 희생했던 쓰디쓴(?) 경험이 있지 않았었을까 싶다.
곰곰히 생각해 보고 두번 다시 무지한 폭언을 자랑스럽게 되풀이 말아주기 바란다.
또한 보이지 않는 우리 마음은 언제나 볼 수 있는 우리의 육체를 통하여 밖으로 노출된다는 사실에 유의하고 아낌없이 주려는 애인의 선물로 그 사랑의 심도를 측정하렬 수도 있는게 바로 그대라는 것을 명심했으면 한다.
사랑이 있으면 무엇이든 아까울 수 없는데 반해 사랑이 식어가면 자꾸만 아까운 생각이 늘어나고 미움이 앞서고 말면 무엇이든 아까워지는 것이 인간의 상·정이므로 그 행실이나 알뜰한 정성의선 선물을 보고 그 내심의 사랑에 절을 하라.
행실이 마음의 저울이란다면 알뜰한 선물은 마음의 저울이 아닐까?
최치규(청파동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