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제 가을도 저물어간다. 마지막까지 母技에 매달려 조落을두려워 하던 나무 잎도 이제는 하는 수없이 외로히 떨어져 간다. 마지막 금빛 가을볕을 받고 고요히 잠든 무덤 앞에 최후의 순례자가 기도를 끝내고 돌아서는 뒤로 묘지의 철문이 고요히 닫기면 돌기둥엔 『오늘은 너, 내일은 나』(HODIE MIHI CRAS TIBI)라고 새겨져 있다. ▲11월은 이렇듯이 조落과 죽음과 tjr별의 눈물이 깃들여 있는 季節이지만 만약 이러한 궁극의 人間苦를 깊이 묵상함으로써 거기서 生의 自覺을 通한 靜溫에 도달한다면 이때보다 또한 은혜에 찬 節期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역시 人生은 어떻게 사느냐하는 것도 어려운거지만 어떻게 죽느냐하는 것은 보다 어렵고 그것은 결국 우리의 궁극적인 課題일수 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소크라테스도 『참다운 哲人은 늘 죽는 일의 실천에 몰두하며 따라서 모든 사람 가운데 죽음을 가장 덜 무서워하는 者』라고 했고 그 자신이 이러한 죽음을 실천궁행한 사람이다. ▲이번 연령성월 중에 D교도소에서 한 사형수가 집행되었다. 生時 그와 서신연락이 있었고 미사에도 가끔 같이 참려할 기회가 있어서 평소 그의 경건한 자세에서 修道者的 면모를 엿볼 수 있어 俗人으로서 어떤 감동을 느낀적이 있지만 또 한편 그에게선 그 罪名이 말해주듯 처절한 人生체험을 通한 운명의 낙인 같은 것을 지을 수 없음도 사실이다. 그는 刑場에서 告解를 하고는 宣告이후 7년간 교도소의 신세에 감사하고 남은 동료들에겐 좀 더 잘해주라고 당부하더란 것이다. 마지막으로 수갑찬 손에 쥐고 있던 苦像을 三男妹를 데리고 行商으로 살아가는 아내에게 전해달라면서 집행관들이 면구할 정도로 태연히 죽어간 것이다. ▲그는 아마 소크라테스란 이름조차 못 들어본 無學한 사람이지만 신앙을 通해(영세한지 3년) 『항상 죽는 일의 실천에 몰두함으로써』 그 哲人과 유사한 죽음을 실천할 수가 있지 않았나 싶다』 ▲『고뇌를 通해 지식은 온다』란 말이 있다. 이즘 某 哲學博士 신부가 환속함으로써 세간에 떠들석한 화제를 일으키고 있다. 이런 석학성직자의 변절은 확실히 일부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끼칠 우려가 없지 않지만 영혼이 진리의 진정한 깊이에 도달하는 길은 반드시 學問만이 아니란 것을 생각할 때, 이 無學한 死刑囚의 『生과 죽음의 고뇌를 通한 지식』은 우리에게 보다 큰 감화를 주지 않을 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