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늦게 어떤 修道院의 門을 두드리는 초라한 모습의 한 나그네가 있었다고 합니다. 門을 열고 무엇을 願하느냐고 물으니
『平和!』
라고 한마디 외쳤다는 것입니다. 後에 알고 보니 그는 저 有名한 詩人 단테였다는 얘기입니다. 아마 단테가 고향에서 몰려나 天下를 流浪하고 있었을 시기의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도 지금 「平和」를 무엇보다 간절히 願하고 있읍니다. 우리뿐 아니라 人類全體가 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친 나그네가 故鄕을 그리듯이 平和를 그리고 있습니다.
平和는 무엇이기에 이렇게 힘드는 것입니까. 우리는 잡히지 않는 파랑새를 쫓고 있는 것이겠읍니까. 戰爭의 反對가 平和인 것 같지도 않습니다. 戰爭이 없을 때라 해서 반드시 平和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平和」 속에서 새로운 戰爭이 마련되기도 하지 않습니까. 義로운 戰爭은 오히려 平和를 守護하기 위한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 地上에서 戰爭이라는것이 永久히 사라지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러므로 沈黙이 바로 平和는 아닌 것 같습니다.
沈默속에 不安과 恐怖가 더 많은 경우가 있읍니다. 平和는 利權의 數學的 分配나 「힘의 均衡」으로는 達成될 수없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平和共存」이라든가 「武裝平和」는 野慾과 權力을 原理로 삼는 것이기 때문에 참된 平和라고는 할 수 없읍니다. 强要된 平和는 平和가 아니며 平和의 그림자도 못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平和는 外部에서 오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 世上의 온갖 것이 다 있어도 平和 한 가지가 빠지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平和는 一方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무엇과 무엇사이에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結局 그것은 秩序이며 또한 强要된 秩序가 아닌 「사랑의 秩序」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秩序는 和解하는데서 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福音을 읽어가면 여러 군데 平和에 대한 말씀이 있읍니다. 『화목하는 耆는 眞福者』라고하시고 復活하신 後에 弟子들에게 나타나실 때 첫 마디가 「平和」였고 『내가주는 平和는 世上이 주는 것과 다르다』고 하셨읍니다. 平和는 그리스도의 사랑 以外에는 아무데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 품안에 안길 때까지는 不安하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합니다.
그 품안에서만 萬物이 和解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늘과 땅이 和解하고 靈魂과 肉身이 和解하고 人間과 自然이 和解하고 國家와國家가 和解하고 平和가 시작되는 곳은 그리스도의 품속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詩人 단테가 찾은 平和도 이것이었을 것입니다.
크리스마스가 또 다가오고 있읍니다. 사랑의 季節이라고 합니다. 하늘과 땅이 和解하는 季節입니다. 하늘에는 榮光, 땅에는 平和라는 天使들의 노래도 그러한 뜻이라고 생각됩니다. 『主의 平和가 여러분과 함께! 또한 司祭와 함께!』 (끝)
朴甲成(西江大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