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롭게도 筆者는 판공성사때마다 성사는 건늬게 된다. 판공성사표를 받아놓고 호주머니 속에서 만지작 거리다가 때를 놓치는 적도 있다. 언젠가는 엉뚱한데서 성사를 보고, 표지 뒤에 聽罪司祭의 「싸인」을 받아 本堂사무실에 전한 일도 있었다. 한번은 M本堂에서 성사표를 디밀었다가 툇자를 맞았다. 本堂으로 가라는 것이다. 「싸인」을 거부(?)하는 神父님도 있었다. 「良心」이 곧 그것이 아니겠느냐는 말씀이리라.
아뭏든 本堂을 떠나 他本堂에서 판공성사표를 들고 서성거리는 것은 잘하는 일은 못된다. 職場에 매달리다보면 사실 제때를 맞추어 성사를 보는 것도 여간 번거롭지 않다. 하루는 老母께서 「冷淡」해선 못쓴다고 크게 꾸짖으신다. 老母께서 생각하시는 「冷淡」의 근거는 판공성사를 「畢」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뜻밖의 봉변이다. 筆者는 冷淡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
「冷淡者」 얘기중에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다. 佛蘭西를 다녀온 N畵伯을 만났더니, 그곳의 信者중 60%는 冷淡者라는 「쇼킹」한 얘기를 들려준다. 日曜日도, 큰 축일도, 판공성사도 없이 지내더라는 것이다. 그곳 神父들이 하는 일은 이 冷淡者들의 心情을 이해하고 깨우치는 것으로 중요한 몫을 한다고도 말한다. 왜 敎會를 멀리하는가? 그들은 과연 神을 거부하는가? 생활환경은 어떤가? 社會的인 地位는 어느정도인가? 人生의 意義는 무엇인가? 神父들은 악착같이 끈질기게 冷淡者들을 追跡하며 이런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구한다.
聖經은 바로 「잃어버린 한마리 羊」에 대한 愛情을 일깨운다. 신자들이 敎會로 다가가기 前에 敎會가 信者에게 다가가는 태도 一. 그것은 바로 자비로운 그리스도의 태도이기도 한 것이다. 敎會는 도도하게 멀리 서서 손짓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不斷히 追求하며 「人間의 現場」에 뛰어들어야 한다. 美國의 「뉴욕」市에서는 지난 성탄절에 어느 젊은 神父가 路邊에서 「미사」를 올려 話題가 된적도 있었다. 『당신들이 찾아오지 않기 때문에 내가 당신들을 찾았다』고 그 神父는 後에 말했다. 이쯤이면 「宗敎社會學적인 問題」로 「클로즈업」된다. 우리 敎會도 信者數를 늘리는데만 마음을 쓸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羊들」에게도 誠實한 熱意를 베풀어야 할 것이다.
崔鍾律(月刊中央編輯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