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한국천주교회사상 처음으로 맞는 「평신자의 날」이다. 교회가 평신자의 날을 설정한 이유는 평신자에게 좀 더 사도직을 수행해 달라는 부탁에서 일 것이다.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공동체 건설에 관한 사명과 기능은 다르나, 권위나 활동은 평등하게 사제와 공유하고 있는 것인지라 평신자라는 교회헌장의 정신에 따라 『본당신부만이 세속에 대한 교회의 구속사업 전체를 다할 수 있도록 신품성사를 받은 것은 아니다』(헌장 4장)를 강조하는 뜻에서 「평신자의 날」은 탄생했다. 사제와 더불어 그리스도의 사제직·예언직·왕직에 참여하도록 되어있는 평신자가 그리스도 신비체의 왕성한 지체로서의 보다 더 알찬일꾼이 되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간절하거니와 또 한편으로는 평신자에 대해서 너무도 거리를 두고 있던 사제들이 스스로의 자세를 고치고, 비록 사명과 기능은 다르나 그리스도 공동체건설에 관한 권위나 활동은 평등하다는 점에 대한 반성을 새롭게 하는 계기도 되어야하겠다.
사실 「평신자의 날」을 제정할 만큼 신자 사도직이 중요한 것이라면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할일은 권위주의적 교회체제의 체질개선부터 앞세워야 할 것 같다. 20세기에 들어선 한국교회는 참으로 전제군주정치의 안일 속에서 70년을 살아 왔다. 그러한 권위에 거역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고, 그 체제에 의심을 품은 자도 없이 주교는 「상감마마」요 신부는 「대감」 노릇을 거리낌 없이 해왔다. 그래서 어쩐지 어두컴컴한 권위주의와 관료주의가 항상 도사리고 있었다. 봉사하러 온 사람은 없고 봉사받으러 온 사람뿐인 「별유천지 비인간」의 세계가 바로 조직면에서 본 우리교회였다.
이제 평신자에게 전투적 가톨릭이 되기를 기대하고 복음화에 앞장서는 크리스찬이 되기를 바랄진대, 우선 발랄한 그 「에너지」의 해방부터 시켜놓지 않으면 어려울 것 같고 체제비판의 자유부터 주지 않으면 역시 「평신자의 날」은 「평신자 유지의 날」 이상이 될 것 같지 않다.
다 같이 힘을 합하여 교회를 개혁하고 생명의 은총으로 가득차게 하려면, 사적으로는 온갖 뒷공론을 다 하면서도 공적으로는 모든게 「타부」되는 그러한 체제와 체질부터 뜯어 고쳐져야 한다.
동시에 이와 같은 정당한 「자유화」의 원칙은, 평신자 사도직의 조직과 기구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이때까지의 교회의 권위주의는 평신자 기구에도 적용되어 왔다. 그래서 소위 교회 유지들의 어용기관이 「총재」를 추대하고 무슨 조직을 만들고 사도직 일선근무자들 위에서서 호령하려 든다.
사도직은 단체로도 개인으로도 수행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구든지 좀 더 열렬한 사도라면 반드시 무슨 단체의 일원으로 가입하여 그 단체의 활동을 통하여 더욱 개인 사도직을 보완하려는 열성을 가져야 한다. 따라서 적어도 교구적인 혹은 전국적인 기구의 조직과 구성은 단체 사도직에는 전면 흥미가 없는 소위 유지들로서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평신자 개인이 아닌 사도직 단체의 협의체라야 하고 또 그것이 아니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러한 중앙협의체의 임원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면 반드시 단체사도직의 일선근무부터 해 올라간다는 열성과 겸덕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평신자사도직의 원만한 발전을 위해서 또 한가지 고려되어야할 점은 교계제도가 할 수 있는 일의 한계점을 명백히 해둘 일이다. 우선 평신자사도직기구에 「총재」라는 칭호는 적어도 「바티깐」Ⅱ 이전의 것이다. 그것은 아무래도 「영적지도자」이외일수는 없다. 동시에 「지도신부」라는 직책도 마찬가지로 「영적지도자」일 뿐이다. 따라서 무슨 단체의 지도신부든지 그 단체원의 영적지도와 그 단체사도직 수행의 방향이 교회에서 이탈되지 않도록 지도하는 것 이외에, 그 단체를 순전히 자신의 어용기관으로 만들어 버리고, 그 단체의 실질적인 「보스」 노릇을 하려는 것이 되어서는 안되겠다.
요컨대 평신자라는 신분이 교회헌장에 규정된 것도, 평신자사도직이 오늘의 교회개혁의 유일한 분출구가된 것도, 20세기 문명의 다양성과 전문화, 그리고 현대인의 자주성의 강조 때문인 것을 알고보면, 우리는 좀 더 고식적인 미봉책을 벗어나서 보다 대담하고 보다 적극적인 사제와 평신자의 대화의 광장을 마련하고 사제와 평신자가 다같이 평신자사도직에 관한 강력한 훈련을 받는 기회를 갖는 일이 시급할 것 같다.
동시에 평신자는 긴 세월동안의 머슴살이에서 벗어나서 좀 더 자유정신을 가지고 사제를 그리스도안의 형제로서 대하고 사제와 더불어 「자기 자신이 또한 교회」라는 것을 깨닫고 사제와 함께 그리스도 공동체 건설에 대한 평등한 권위와 활동을 유감없이 발휘해야 할 것이다.
사회생활의 그리스도께 대한 봉헌과 죄악의 정복과 복음화의 성소에 대한 평신자의 사명과 기능이 발휘됨이 없이, 아무리 「자유화」를 부르짖어봤자, 그는 벌써 신비체의 고목(枯木) 가지밖에는 안되는 존재이며, 따라서 아무런 발언권도 없는 존재이다. 「평신자의 날」을 맞이하는 모든 평신자는 정말 「포도밭의 일꾼」이 되면서 크게 발언을 하라. 아무 일도 않는 것도 답답하거니와 아무말조차 없는 것은 더욱 답답한 일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제와 더불어, 교회 안에서, 평신자들이 이제부터 일과 말을 좀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