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바티깐」 공의회 이후 초래된 부작용의 일각으로 사제 독신제에 관한 문제가 일부 국가의 젊은 사제들 간에 甲論乙駁식으로 논의되는가 하면 어떤 사제들은 성을 떠나 취혼까지 감행하는 외국의 예를 우리는 오늘까지 피안의 불을 보듯 구경만 해왔었다.
그러나 지난 11월 17일字 某 주간지에 「나는 왜 還俗·結婚했나」라는 제목아래 前 신부 崔昌成씨의 고백적 기사가 실림으로써 그 불은 이제 우리 발등에 직접 떨어진 현실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것이 국내에서는 최초로 공식화된 「매스콤」망을 통하게 된 것인 만치, 일반에게 「센세이셔널」한 화제거리를 제공했음은 물론 신자대다수에게는 형언할 수 없는 충격을 주었다고 믿는다.
더우기 그의 성직편력과 환경을 알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더욱 아연함을 금할 수 없는 것이다.
崔씨는 4대에 걸친 가톨릭신자 가정에 태어난 태중교우로서 10대의 소년시절부터 성직을 위한 관문에 들어선 이후 오늘까지 무려 30여년이란 세월을 오직 성직의 직선만 달려왔으며 氏의 인생연륜 역시 장년기를 넘어가는 사경기(斜傾期)에 접어든 데다 또한 해외에서 수학하여 철학박사학위까지 획득한 바 있어 더한층 아쉬움과 함께 崔昌成이라는 한사람의 자연인에 대해 무한한 동정의 염을 금할 수가 없다.
氏의 고백서(?)가 자신이 만든 운명의 「아이러니」를 끝까지 합리화하기위해 위장도표를 시도하려했는지, 아니면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 잔존해있는 한가닥 양심때문에 그런 옹색한 변명과 궤변에 가까운 어조로 자기 합리화를 했는지 모르겠다. 씨는 지금까지 자기가 걸어온 성직의 길이 신앙에 대한 회의의 찬 무확신의 길이었으므로 현대 지성인들이 즐겨쓰는 금언인 『무확신은 일종의 자기기만』이라는 주석을 잊지 않았고 그런가하면 성적을 떠나기 직전 한밤중에 『저에게 진실과 확신을 주옵소서』하고 처절한 기도를 했다고 하니 갑자기 무슨 영적인 하늘의 계시를 받은 성자(?)의 모습을 연상케도 한다.
현대는 바야흐로 퇴폐적인 쾌락주의의 풍미에 따라 도덕과 윤리가 전도 찰나에 처한 위기의 세기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는 1차원의 세계에 살면서도 2차원의 길을 걸어야할 사제의 본상을 요구하고 있다. 또한 교회는 교회의 교도권에 속하지 않는 한 모든 일반문제에 대해서 적당히 공개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금번 崔 신부 문제나 또 같은 시기에 항간에 떠들썩했던 吉 신부 문제도 그 문제발단과 경과에 있어 꿀먹은 벙어리처럼 함구무언하다가 기어코 사회 「매스콤」에 기습을 당하여 일반신자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도무지 현명한 처사가 아닌 줄로 안다. 물론 이런 문제는 사목적 견지를 고려하여 黙秘되어왔으리라 이해는 하지만, 그러나 진실로 사목적인 문제를 생각했다면 오히려 더욱 일찍 교회 보도기관과 기타방법을 통해 우리 교회자신의 자세와 입장을 명백히 하면서 신자들의 당황을 미리 막아주는 설득과 조처가 있어야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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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남주(부산 광안동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