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 天主敎는 시련을 받는 것 같다. 그야말로 多事多難하다. 위로는 「로마」 敎皇廳에서부터 아래로는 村구석 적은 聖堂에 이르기까지 무언가 흔들리고 있다. 우선들면 産兒制限禁止問題요, 神父들의 還俗이요, 平信者들의 발돋움 등등이다. 産兒制限은 앞으로 시비가 좀 더 꼬리를 물것 같으나 이미 敎皇의 이름으로 온 人類에게 금지할 것을 宣布한 이상 信者들은 오직 따를 뿐이다. 勿論 盲目的으로 따르자는 것은 아니다. 나만은 그렇게 생각된다는 것이다.
敎皇께서 깊이 생각하고 밝게 따져서 일르시는 일이라 믿기 때문이다. 天主敎의 敎理는 이미 2千年을 두고 다듬어왔으나 眞理는 永久不變이다. 우리 信者들은 어린 半인양 믿고 배우고 우러러 따르는 美德을 간직하고 救靈의 所望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東洋에서는 天不生無祿之人이라 해왔다. 貧農의 집에 子女가 아무리 우글거려도 저 살길은 다 있다는 것이다. 막연한 말 같으나 그런대로 살아오지 않았는가.
人口를 주릴 생각을 할 것이 아니라 늘어나는 食口들을 어떻게 먹여 살리는가… 그 道理를 뚫어야할 것 같다. 科學이 極度로 發達된 오늘 産兒制限 같은 어설픈 짓은 좀 치사하다. 머리 좋다는 數많은 學者들은 責任을 느껴야 할성싶다. 産兒制限이 無責任한 亨樂主義者들의 免責에 利用된다면 그것은 寒心스러운 일이요, 人間의 尊嚴性은 짓밟히고 만다. 政治家들은 손쉽게 法은 만들어내지만 人間을 人間以下로 떨어뜨리는 過誤에는 거의 無恥이다. 이것은 두려운 일이다. 하루바삐 人口가 아무리 늘어나도 거뜬히 살아가게 해주는 科學者가 나타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神父들이 환속을 한다고 놀랄 것은 없다. 그분들은, 不具者는 아니다. 平生동안 童貞을 지키고 천주님을 받들어 聖職者가 되겠다고 盟誓를 했기에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언제나 한 사나이로서 배필을 求할 수 있는 可能性은 지니고 있었고 또 그가 破戒를 敢行하고 結婚을 한다고 投獄을 하거나 抑制할 만한 法도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 같은 君師父에 대한 道德觀念이 뿌리 깊은 나라에서는 크나큰 충격이다. 나 역시 神父님은 無條件尊崇하고 그가 女子에게 눈길을 보내고 結婚을 하기 위하여 聖職을 버리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그 信念의 一角이 허물어졌다. 不幸한 일이다. 還俗한 분의 새가정을 위하여 축복드릴 마음의 여유는 없다. 만일에 이것을 契機로 성당서의 神父님의 處地가 몹시 難處해진다면 더욱 重大한 問題이다. 떨어져 나간 분은 홀가분할지는 모르나 그분들이 끼쳐놓고 간 後遣症은 아마 오래갈 것 같다. 淑女들이 神父이시기에 그야말로 아버지 같이 따라왔지만 萬一에 여기서 神父도 사나이라는 생각이 새로울 때 몹씨 망서리게 될지도 모른다. 답답한 일이다.
平信者와 神父와의 問題 亦是 요즈음 크게 論議되고 이미 많은 改革이 시도되는 단계이지만 遲遲부진이다. 옛날에는 神父님이 信者에게 下待를 하기를 兩班이 常漢에게 하듯이 했고 잘못이 있으면 종아리도 때렸다고 듣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神父를 尊敬함이 師父에 못지않고 神父의 앞에서는 저절로 고개를 숙인다. 이것을 美風으로 여기는 이도 있다. 來歷이 이런지라 平伯者가 제구실을 하는 데는 앞으로 許多한 지장과 난관이 있을 것 같다. 이런 일은 性急하게 서두르면 副作用이 커서 困難하다. 조심성있게 꾸준이 추진함으로써 흠없이 탈없이 實踐하기를 바란다.
(朴甲成氏의 본란 연재가 지난호 10회로 끝나고 이번호부터 이서구씨가 집필합니다.)
李瑞求(劇作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