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몇 천원을 치룰 수 있는 좀 생활이 넉넉한 사람들의 자녀를 두고 할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약 덕분으로 홍역균이 우리나라서도 맥을 추지 못하게 됐다. 다행스런 이야기이다. 이것이 아니었더라면 모든 부모들이 귀천을 가리지 않고 귀여운 아기와 함께 병마의 위협에서 死線을 넘나들었어야 했으니 그 경황이 얼마나 초조할까? ▲우리네 조상들은 이처럼 무서운 홍역을 치루기를 겁내면서도 어차피 겪어야할 苦鬪로, 오히려 치뤄야만 사람구실을 하는 것으로 믿어 왔다. ▲이런 홍역을 한번은 앓아야 한다고들 이야기된 -공의회가 몰고 온- 소위 진통을, 오늘 한국교회가 겪기 시작한 것 같다. 성직자들의 독선·권위주의들이 공개적으로 논란되는가 하면 평신자들의 「유다스」적 배반·위선과 게으름·무관심·이기적 신앙 등·또 무척 드러내길 싫어했던 사제의 환속 등이 그것이다. ▲금년들어 이같은 반성작업이 구체화했는데 최근에는 대신학교서 혹은 예수회 또는 평신자단체 등이 수세기동안 교회가 안고 온 많은 헛점과 결함을 각성·쇄신키 위해 연구회 혹은 좌담회 등을 개최하고 있다. ▲나올만한 비판이나 반성거리는 거의 이야기되고 있다. 어차피 겪어야할 진통이기에 좀 더 빨랐더라면 싶기도 하다. 그런데 이 진통을 어떻게 겪느냐가 문제다. 비판을 위한 비판, 시비를 위한 시비만이 한없이 계속된다면 다람쥐 채바퀴도는 이상의 것을 바랄 수 없지 않은가? 비평은 쇄신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값어치가 없다. 개중에는 성직자 혹은 평신자의 잘못을 지적하는 대목들이 많다. 책임을 묻는 소리도 있다. ▲그러나 이 마당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교나 성직자 혹은 평신자로서의 「나」 보다 「교회」가 언제나 앞서있으며 교회를 위해 주교이요, 성적자이며 평신자임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주교인 「내」게, 신부 「나」를 혹은 평신자의 대립적 관계가 지속돼서는 안되며 대립적 논난이 궁극이라면 또다시 「우리」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고 맡게 된다. 어차피 치뤄야 할 진통을 사내답게 건설적으로 치루어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