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 우리는 어쩐지 벅찬 나날을 보내는가 싶다. 天主敎內에서 풍기는 바람이 너무나 새롭기 때문인가 보다.
격변하는 世波가 우리에게도 닥쳐온 것 같다. 우리는 그간 聖堂에 나가면 오로지 順命을 하기에 餘念이 없었다.
그러던 것이 平信者의 所任이 차츰 重視되고 이로 因하여 神父와의 處地가 좀 妙하게 돼가는 것 같다.
다시말하면 우리의 先代에서는 神父는 오로지 尊敬하여 順命할뿐 敢히 拒逆이란 念頭에도 두지 못했다. 勿論 지금도 그렇게 지내고 있다고 본다. 그런던 것이 어느 틈에 平信著의 存在가 重視되고 그들의 能力을 最大眼 敎會運營에 이바지 하게 하자는 主張이 한창이다.
앞서, 拒逆이다 하였지만 그것은 마치 子息이 父母에게 철없이 犯하는 拒逆이란말이다. 平信者의 敎會運營 참여가 자칫하면 神父님에게 拒逆을 한다는 느낌을 끼치지나 않겠는가 그런 뜻에서 몹시 송구하다. 어쨌든지 오늘까지의 實情은 거의가 神父님의 意思에 順從함으로써 信德같이 여겨온 것은 事實이다. 그러나 敢히 따진다면 神父도 우리와 다름없는 一個男兒이다. 그가 神父되기를 源해서 擇한 것이니 하나의 職業으로 보아 마땅하다. 다못 그분이 聖職者인 点에 尊敬과 順命을 바치게 되는 것이다. 더욱 좁혀서 따진다면 神父는 神父로서의 聖職을 遂行할때와는달리 平常時 敎會運營을 相議할때는 世俗에 밝은 平信者의 意見이 優秀할지도 모른다.
이런 点에서 神父우ㅏ 理解와 寬容이 지극히 要望된다. 萬一에 主任神父 中의 單한분이라도 平信者의 參與를 마땅치 않게 생각한다면 그 敎會에 나아가는 信者들은 甚히 難處해진다. 뿐만 아니라 不幸한 일이다.
그러니까 아무리 떠들어도 平信者의 參與는 어느 때든지 神父의 態度가 너그러워질 때 비로소 成就된다는 것이다. 各 敎會의 運營狀況을 살피면 그렇지 않은 곳도 있지만 아직도 信者는 바치면 되고 神父는 거두어서 쓰면되는 形便인식성 싶다. 그렇다고 무슨 不滿不平이있다는 것은 아니다. 이미 不信者의 所任을 中侍하는 마당에서 있는 우리 平信者인지라 새삼 重責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財力이 넉넉치 못한 敎會이고보면 오로지 죄송할 뿐 무슨 염치에 收入·支出의 내용에 아랑곳을 할 것이랴. 그래서 어느 교회 회장은 神父님 앞에 나아가 『교회 형편이 하도 넉넉치 못한 근소한 돈으로 어떻게 지내시는지 하도 딱해서 묻습니다』 어려운 질문을 했다는 것이다. 神父가 너무 貧困하게 지내시지나 않는가 걱정이 안될 수 없다. 財上分明은 대장부라는 말도 있지만 어쨌든 교회운영을 神父혼자서 하는 일은 그만 止揚되었으면 개운할성싶다.
12월 1일은 平信者의 날이다. 해서 講論이 平信者에게 許諾이 내린 오늘 神父와 信徒는 一致되어 運營의 合理化가 期必코 成就되기를 바란다.
信者가 敎會에 나가는 目的이 이제 그깟 運營에 參與하는데만 있으랴만 敎會運營이 그릇되면 모든 일이 그릇된다. 萬一에 神父는 獨斷·신자는 방관하는 교회가 있다면 이번 기회에 再考있기를 빈다. 그러나 敎會의 어른이시요, 牧者이시요, 聖職者이신 神父님이 自進하여 신자들에게 參與奉仕할 榮光을 베풀어주는 것보다 더 마땅한 일은 없을 줄 안다.
李瑞求(劇作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