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院君의 夫人이 敎友라는 것은 周知되고 있지만 大院君의 막내 따님으로 열심한 신자가 있어서 마침내 아버님 손에 죽어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지난번 福者修女院 金修女님의 作이 聖心女學校 講堂에서 上演되었을 때 出演은 全部修女님네라서 보는 이에게 깊은 感銘을 준바 있지만 그 戱曲의 女主人公이 곧 大院君의 따님이었다. 한창 꽃같은 나이에 天主敎를 믿고 뿐만아니라 天主敎를 믿는 青年과 사랑을 한다는 罪로 아버님 손에 죽어가는 「스토리」였다.
筆者가 金修女님에게 물으니 어느 著書엔가 그런 대목을 보았다는 것이다. 짐작컨대 柳洪烈博士의 著者인성 싶다. 그렇다면 신빙성은 더할 나위 없다고 본다.
그러나 大院君宅 族譜를 보면 따님은 세분이다.
第一女嫁 趙凝鎬 第二女嫌 李允用 第三女嫁 趙㸟九
여기까지는 分明하게 나와있으나 시집도 못가고 죽어간 또 하나의 따님은 나타나 있지 않다. 만일에 그분이 實存者이요, 그 행적이 갸륵했다면 이대로 지나치지는 못할 것이다. 물론 戱曲은 作者의 虛構가 許容되는 것이니 그것을 가지고 하는 말은 아니요, 이런 事實은 極히 이 색적이라서 좀 더 깊이 알아보면 萬人의 눈물을 자아낼만한 秘話도 있을 것 같다.
이런 일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려면 記錄이 분명해야 하고 보다 더 必要한 것은 老人들 中에서 그때 그 일을 목격한 분이나 傳聞한 분에게 確認하는 일이다. 그러나 事件이 事件인지라 기록에 남아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 대신 記錄보다도 더 正確한 盡人은 찾으면 있을 성싶다. 운현궁에도 老人들이 남아있고 또 운현궁과 關聯이있는 집에 老人들도 더러는 生存해 있는 싶다.
이런 일이란 한時라도 바빠 서둘러야지 차일피일 미루다가는 證人이 死亡할 우려가 있다. 筆者가 겪은 일이지만 李朝末에 大科及第를 하고 光禁의 遊街를 한바있으며 承政院에 나아가 高宗皇帝 앞에서 承旨까지 지낸 閔應植 先生을 廣州 山莊으로 찾아가 뵈온지 1個月이다 못가서 別世를 한 일이 있다. 1個月만 늦게 갔더면 그 貴重한 史料는 永久히 얻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런 경험을 지닌 筆者로서는 안타깝기 짝이 없다. 韓國가톨릭史에 뜻을 둔 專門家 어느 분이든지 이 事實을 좀더 分明하게 또는 좀더 詳細하게 알아보기를 바라는 바이다.
그것이 옳게 된다면 必是 小說과 戱曲으로 더 많은 作品이 나올 것 같다. 筆者 또한 붓을 들고 그것을 苦待하는 사람中의 한사람이다. 古蹟을 찾아 山으로 물로 찾아가는 그것과 똑같이 사람을 찾아다니며 記錄못지않은 貴重한 史料를 알아내는 수고는 어렵기는 하지만 해놓으면 얻는바 자못 크다고 생각된다. 산 證人이 죽어가기前에 알아놓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李瑞求(劇作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