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某 주간지에 실린 崔昌成씨의 『나는 왜 還俗結婚했나』라는 기사가 급기야 교회당국과 신자들에게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고 말았다. 씨의 환속은 세간에 조소와 동정, 贊反의 분분한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이유야 어떻든 하나의 성직자를 잃었다는 것은 우리교회의 큰 손실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신부가 환속했다는 것 그 자체로써 비난과 조소를 일삼는 일부 신자들의 태도는 더욱 실망적인 것이었다.
역사와 전통이 극히 보수적인 우리 교회에는 어느 때부터인가 하나의 미신이 전래되었다. 신학교에 들어가면 갑자기 天神이나 된듯 우럴어보고 신학교를 그만두면 마치 마귀로 변한 듯 천시 경멸하는 따위의 미신, 바로 그것이 오늘도 崔昌成씨를 소외와 절망의 심연으로 밀어 넣으려하고 있다.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려는 「바리세이」 일당을 붙잡고 예수님이 죄없는 자 돌로 치라고 말하였을 때 아무도 돌을 던지지 못하였다는 것은 그들에게 훌륭한 양심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바로 나를 포함한 현대의 「바리세이」들, 소위 휴머니즘과 합리주의로 神의 존재를 방정식으로 풀어보려는 원자시대의 아들들은 서슴없이 돌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崔昌成씨와 함께 마땅히 책임을 나누어야할 죄인들이다. 오늘의 崔씨를 만든 것은 성직자 평신자를 막론하고 바로 우리의 차디찬 무신앙이다. 역사적인 제2차 「바티깐」 공의회 이후 말끝마다 「공의회 정신에 따라서」라는 단서를 붙이지만 공의회가 왜 있어야 했는가도 뚜렷이 모르는 우리들이다.
시대에 뒤떨어질가 극장엔 가끔 가지만, 공의회가 채택한 교회헌장 하나도 제대로 읽지 못한 우리들이다. 평신도사도직을 논의하지만 실제로 자신의 聖化에 무관심하고, 교황의 산제회칙에 막연히 유물론자들과 같이 회의하기도하는 우리들이다. 또한 신부를 곧잘 비판하면서 교회유지를 위하여는 백원한장 헌금하기도 아까워하는 열심한? 신자들이 바로 우리다. 성경을 「베스트셀러」라고 하지만 성경을 제대로 구비하고 생활하는 형제들이 그 얼마나 되는가 절규하고 싶다. 우리는 이제 심각하게 自省할때를 맞이하였다.
물질문명과 향락이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의 신앙을 교란시키려 하는 이때에 「씨자」냐 「천주」냐 분명히 선택하고 행동해야 하겠다. 행동하지 않는 似而非신앙은 차라리 없느니만도 못하다. 崔昌成 신부의 환속을 찬성하거나 두둔하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다. 이기회에 崔씨를 비난하기보다 우리자신의 한심스러운 신앙상태를 허심탄회 인정하고 쇄신하자는 것이 본고의 의도이다. 사실상 인간은 자신의 장래를 자유로이 결정하고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그러한 자기결정이 심각한 자기통찰과 반성에서 우러나왔다면, 우리는 崔氏의 행동을 비난할 근거가 없게 된다. 氏가 이러한 결정을 내리기까지 헤아릴 수없는 고민을 하여왔다는 대목에서 무한한 동점을 금치 못하였다. 더구나 착하게 여생을 보내겠다는 氏의 말에 인간적인 동정과 찬사를 불금하면서 氏의 생계에 필요하다면 진실하고 유력한 크리스챤들의 협조를 호소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한하며 우리는 그분의 제자들이기 때문이다.
(揚晟‧銀行員 서울 영등포구 흑석동 74의 53-9통 7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