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신문에서 落第生의 특별기사를 취급한 것을 보았다. 學生時代에 낙제한 일이 있지만 사회에 나와서 성공한 사람들의 인생경력을 소개한 것이다. 훌륭한 사회명사의 경우도 있었고 사업가의 경우도 있었다.
그 計劃記事의 취지는 추측하기에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進學의 季節과 더불어 낙방한 학생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분발을 촉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기나긴 人生을 생각할 때 일시적인 낙오가 문제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을 인용한 논설이나 「칼럼」도 쓴 것을 보았다.
해마다 進學의 季節과 더불어 그 기억이 되살아 난다. 今年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금년 고등학교 졸업생은 약 11만, 그중 예비고시에 합격한 학생이 약6만여명, 그중 대학에 진학 할 수 있는 학생이 약4만5천여명이라고 한다. 따지고 보면 과반수가 훨씬 넘는 학생들이 大學에 진학할 수 없게 되었다.
實力대로 努力한대로 결정된다지만 낙오한 당사자들이나 부모들의 괴로운 심정은 이루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나도 직접 경험한 일이 있으므로 남의 일로만 돌릴 수는 없는 심정이었다.
인생의 위기가 있다면 낙오의 순간이 아닐까. 그 순간의 불행과 비탄은 누구나 뼈저린 것이며 동감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인생의 전부를 결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入學시험이다, 入社시험이다, 젊은이의 성장에는 몇고비의 난관이 있지만 일시적인 낙오가 문제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겠다.
오늘날 미국의 리쳐드 닉슨 대통령은 七顚八起의 굽힐 줄 모르는 정신의 소유자로 찬양을 받는다.
그는 한때 대통령 선거에서 또 그후 加州 州知事 선거에서 패배햇다. 加州 선거에서 당선됐더라면 오늘날의 영광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故 처칠 경은 「퍼블릭 스쿨」에서 낙방하자 海軍士官學校를 갔는데 그가 「퍼블릭 스쿨」에 합격했더라면 그후의 길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인생의 위기와 낙오의 순간은 變化와 轉換의 순간이라고 볼 수 있다. 불행한 凶報는 분명히 變化의 성격을 가진 것이다. 그것은 행복으로 변화하고 전환할 수 있는 순간이다. 그와 반면 吉報는 그러한 作用을 가지지 않는다. 결국 凶報나 吉報의 차이는 분간하기 어려운 것이 아닐까. 어려운 순간일수록 落望할 필요는 없다. 그럴수록 새로운 분발과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 한다. 轉禍爲福이라는 말은 결코 무의미한 낱말이 아닐 것이다.
不幸이나 試鍊을 달게 받는 것은 基督敎의 慈悲의 상징이지만 人間의 위기와 낙오의 순간에 勇氣를 북돋아준다. 絶對者에 依存할 때 행복과 불행의 차이는 그야말로 그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사실이라고 하겠다.
梁興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