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구원 노력에 있어 어느때를 막론하고 여성들의 위대한 공헌을 교회는 찬양해 왔고 오늘도 이를 필요로 함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 가운데 수도회 특히 여자수도회의 공헌은 거의 절대적이었고 교회가 오늘날과 같이 위기에 처할수록 그 필요성은 정비례해서 증대함을 우리는 확신한다.
이런 의미에서 본지는 우선 「邦人 수녀원을 찾아」봤고, 오늘 현대의 수도생활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그렇다고해서 수도생활의 이념과 목적 같은 근본논을 여기서 파헤치자는 것도 아니요 다만 지금 각 수도원에서 걱정하고 있는 줄어가는 성소문제를 한번 심각하게 말하고저 한다.
대개의 경우 처녀가 나이가 차서 학교도 졸업기에 접어들때면 한번씩은 결혼? 수도생활? 독신?하고 장래를 설계하며 심사숙고한다.
그러나 그많은 여학생들이 한번씩은 거의가 다 생각해 보고 찾아가 보고 말해 보고 하다가 『차라리 결혼하지』하는 결론을 내린다. 그럼 왜 이런 결론이 나오도록 되는지 그 많은 이유중 한가지를 말해보고 싶다. 물론 현대인들이 무질서하게 내세우며 말하는 자유 · 인권 · 개성 · 안일 등이 젊은 처녀들로 하여금 성소에서 멀어지게 하는 점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왕 가면 봉쇄수도원으로 가지』하는 소망이 깃들여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럼 왜 『이왕이면』이란 조건을 내걸게 되는가? 다른 많은 문제들이 있으나 이 문제이 중요성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얌전한 여학생이 천주께 온전히 바치고자 수도원 문을 「녹크」할 때는 속에서 불타고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그러나 두번세번 수녀를 만나고 생활하는 것을 보고는 『저렇게 살 바에야 무엇 때문에 수도원엘 갈꼬』하고 수도성소지망의 의지가 식어버린다면 문제는 성소발굴노력과 함께 기존 수도생활의 검토가 불가피하다. 다시말하자면 기성 수녀들의 불평불만에 찬말과 행동, 특히 공의회 후에 해이해진 규칙생활 장상에 대한 불신, 자신을 가누지 못하는 감정생활, 현사조의 실존주의적 이기, 편리주의가 많은 수도원의 담장을 넘어들어가 수도자들의 마음을 뒤흔들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자신의 내적 생활에 흔들림이 있는 수도자가 과연 남에게 평화로운 웃으으로 대할 수 있겠는가? 특히 뜻있는 젊은 여성들을 절망으로 몰아넣는 수가 부지기수가 아닐까? 이런 수도자가 되고 마는 것은 내적 생활의 궁핍, 즉 수도생활의 근본의의를 모르거나 망각하여 기도와 희생의 생활을 등한히 했기 때문이다. 될 수 있는대로 편한 것을 찾는 사람에겐 희생이 있을 수 없고, 기도의 길이가 짧아질때마다 손벽을 치고 좋아하는 사람이 기도의 심오한 맛을 알리 없다. 크리스찬의 원동력인 기도와 희생과 극기를 수도원에서도 등한히 한대서야 그 수도생활이 옳게 되겠는가? 성소가 적다고 탓하지 말고 수도자는 자신들의 내적 생활을 개선하도록 먼저 힘써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성 수녀가 이탈할까봐 전전긍긍하여 온갖 혜택을 다 입히려다가 나쁜 습관만 기르는 것도 문제의 하나일 것이다. 상처난 곳은 매서운 칼로 끊어버리는 것이 얼마나 더 유익한지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하느님은 『한 팔과 한 눈 없이 천국에 드는 것이 온전한 몸으로 지옥으로 가는 것보다 낫다』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