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요즘 와서 새로 생긴 것은 아니지만 요몇해동안을 두고 내 마음이 제일 많이 이끌려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저 먼발치의 산에서 봄부터 여름까지 울어대는 뻐꾸기의 소리다.
내가 겨울밤의 텔레비 옆에 「보난자」라는 연속극을 가끔 찾아 집안아이들과 같이 앉는 것도 사실은 거기 나오는 이야기를 보다 거기 자주들리는 산의 뻐꾸기 소리를 들으려는 것이고, 히틀러를 주인공으로 한 무슨 영화에선가도 내가 제일 감동한건 히틀러의 英雄的 發作이 아니라 그의 英雄的 發作의 틈틈이 멀리 들려오는 그 뻐꾸기 소리였다.
뻐꾸기 소리를 듣고 있으면 내 갈일은 한정없이 먼것이 다시 생각나고, 먼길을 두고 쓸데없이 도중에서 한난울 팔고 있던 것이 생각키고, 두귀는 훨씬 멀리로 틔인다. 누구한텐가 붙잡혀와서 개새끼들 틈에서 얼쩡거리고 살던 한마리 사자새끼가 어느맑은날 사막넘어 어미사자의 으르렁거려 부르는 소리에 귀를 고추세우듯 아니 그보다도 훨씬 더한 자력으로 그 소리는 나를 이끌어간다.
나는 水曜日마다 春川에 있는 어느 女子大學엘 出講한답시고 꼭5년동안이나 오르내렸지만, 그것도 잘 생각해 보면 이 뻐꾸기 소리나 드문드문 어느 山자락에서 차분히 들어보려는 소원밖에 별 딴것도 없었다.
한달에 교통비와 막걸리값 빼면 몇천원 남을까 말까한 강사료라는 것 그것은 물론 핑계일 뿐이다. 講義의효과 - 솔직히 말해서 그것도 역시 가는 길에하고 오는 여벌이 있을뿐이다.
팍팍하고 뻑뻑한 서울살이에 이레만에 하루씩의 빈칸을 만들어서 강원도 山水 바람이나 쏘여 본다는 것 - 그속에는 봄 石壁의 진달래나 가을의 단풍 소양강의 맑은 물도 물론 들어있지만 그속의 動脈이 되는 것은 역시 뻐꾸기소리를 듣는 일이었던 것이다.
春川에서 두어정거장을 加平쪽으로 내려오노라면 江村이란 마을이 있다. 이곳은 京春街道에서는 그 물과 그 山이 뻐꾸기 소리를 귀 종기여 듣기에 제일 알맞은 곳이다.
나는 여기를 가끔 순전히 그 뻐꾸기 소리만을 드를 목적으로 혼자서 봄 여름의 歸路에 들린다. 永遠을 區劃해서 하나도 아이러니나 弄談을 섞지않은 이런 소리를 듣기위해선 이 江村같은데는 알맞는 듯하다. 江村의 江가에는 나무잎만 한 나룻배가 매여있고, 해빌무렵에 보면 흔히 두 母女가 山골마을로부터 나와서 딸을 나룻배에 태워 저켠으로 보내곤 어머니는 이켠에서 딸이 배에서 내려 언덕위의 길로 사라져 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일도 있다. 그래 나는 무슨 옛날 漢詩 속의 古別離와 같은 이런 情景을 얻어 그 뻐꾹새 소리를 다시 그런데 맞추어 들어보는 연습도 하게된다. 그리고 집에 와선 열일곱살짜리쯤의 文學少年이 다시되어 노오트에다 무얼 끄적거려보기도 한다.
뻐꾸기는
강을 만들고
나루터를 만들고
우리와 제일 가까운 것들은
나룻배에 태워서 저켠으로 보낸다.
뻐꾸기는
섬을 만들고
이뿐것들은
무엇이던 모다 섬을 만들고
그섬에다간 그렇지
백일홍나무나 하나 심어서
먹기와의 빈 절깐을…
그러고는 그섬들을 모조리 바다 속으로 가라앉힌다
만길 바다속에 가라앉히곤
다시 끌어올려 백일홍이나 한번 피우고
또 다시 바다 속으로 가라앉힌다.
그러나 이런 文學少年같은 연습쯤 가지고는 영 닿을 수도 없이 아득하기만 한 것이 뻐꾸기의 소리다.
제일 중요한 素材인대로 아마 내가 앞으로 내 생애를 다해도 영 풀이해 보지 못하고 말 것이 이 뻐꾸기 소린 것 같다.
徐廷柱(詩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