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共同社會를 사는 存在인 만큼 되도록 人間 서로간의 關係를 圓滿하게 이끌어가는 것이 絶對로 필요하다. 그러나 圓滿과 逃避를 혼돈해서는 안된다.
옛날에 黃喜 정승은 두 머슴이 싸우는데 兩쪽 다 옳다고 두둔했다. 그리고 『왜 對立된 是非를 옳다고 하느냐』고 따지는 夫人의 말 亦是 옳다고 한 逸話를 우리는 至極히 높은 德行의 所致로 例 드는 것을 흔히 본다. 佛敎의 經典이나 儒敎의 가르침을 보면 남과 다투지 말고 남과 따지지 말라는 敎訓으로 一貫되어 있다. 이쪽이 잘 했고 저쪽의 主張이 옳더라도 讓步하고 싸우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寺院은 物議의 俗世를 떠나 山속 깊이 옮겨 갔도 東洋의 詩歌나 그림을 보면 山水 속에 파묻혀 술과 童子를 벗삼는 것이 大部分이다. 이러한 東洋社會에 있어서 옳은 것을 옳다 하지 않으며 分別을 分別대로 處理하지 않고 덮어 놓고 是非만 回避하는 것을 至上으로 삼는 非合理的인 圓滿主義야 말로 亞細亞的 停滞의 精神的 바탕을 이루었던 것이다. 非合理的 思考는 非科學的 無分別을 낳고 非科學的 無分別은 自然科學은 勿論 社會科學 全般의 發展을 停止시켰다. 그리하여 儒佛敎 등이 東洋人들의 意識形成을 支配하기 이전의 찬란했던 亞細亞의 文明은 제자리걸음을 걷게 되고 그동안 基督敎精神의 바탕으로 是非를 분별해서 合理的으로 事物을 處理하는 西歐文明 앞에 치욕의 屈服을 强制 當했던 것이다.
예수님이 당시 宗敎界를 주름잡던 「바리세이」들의 虛僞와 不正을 따지고 규탄하여 하느님의 참길을 分明히 하는데 生命조차 바치신 것을 볼 때 우리는 예수님이 얼마나 徹底한 合理主義的 生覺을 가지셨던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德으로 말씀하면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온 世界의 사람들이 聖人으로 일컬으는 예수님, 모든 人類의 罪를 대신 속죄하시고 용서하신 지극히 높은 德性 속의 예수님이지만 결코 圓滿을 우해서 是非曲直을 눈감아 넘기시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깊이 명심할 必要가 있다. 圓滿은 훌륭한 德性이다. 그러나 圓滿을 가장해서 權力의 專橫이나 社會的 罪惡 그리고 우리 周圍의의 가지가지의 不合理에 대해서 함구한다면 이는 逃避와 겁나지 결코 德性이 아닌 것이다.
金大中(국회의원 新民黨 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