世界史 가운데 모든 時代의 人間과 관계있는 大事件이 전개된 한 週間이 있다.
이 週間에 한 인간이 죽었다. 사람은 그를 묻었으나 3일 후에 부활했다. 2천년 이래 그이처럼 사랑받은 이가 없었다. 이 사랑은 지금까지 조금도 滅少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또한 그이처럼 미움을 받은 이도 없었다. 지금도 아직 그렇다. 언제나 사람은 죽게마련이다. 그러나 世界史上 처음으로 한 인간이 다시는 죽지 않기 위해 살아났다. 그를 예수라 부른다. 예수가 부활하신 날 新世界가 시작했다. 예수가 죽고 부활하심으로 그를 信仰하는 자에게 오늘은 하느님의 용서와 우정을 그리고 장래에는 그도 부활하리라는 보증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예수가 죽고 부활하신 이래 해마다 신자들은 그가 「예루살렘」에서 지낸 이 마지막 週間을 기념햇다. 부활祝日을 앞서는 이 週間은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入城하신 주간이요 성체성사를 制定하신 주간이요 受難하여 죽고 묻히신 주간이다. 이 주간을 聖週間이라 부른다. 이 주간에 거룩한 예수가 사람들에게 모든 聖德의 源泉을 열어 주셨기 때문이다. 해마다 성주간의 예절은 우리에게 첫 성주간을 재신케 해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성주간에 교회와 함께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시는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도록 여기 「빠스카」의 위대한 신비에 살아야 한다.
사도 바오로 시대에 신자들이 당한 큰 유혹은 십자가를 부끄러워하는 것이었다. 십자가가 유태인들에게 「스켄달」이요 희랍인들에게는 「어리석음」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믿는 이에게는 그것은 하느님의 힘이었다. 시대가 지나 그리스도敎的 文化로 가득찬 세계에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스켄달」은 되지 아니하더라도 그것이 그리스도敎的 信心에서 신비의 정확한 「비죤」 속에 위치하기가 어렵게 되어있다. 우리의 생활은 「십자가의 영광」이 아니요 「십자가 속의 영광」이다.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를 영광으로 삼는다. 그이안에 우리 구원과 생명과 부활이 있고 그이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되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영광의 表示이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하느님 안에 있는 가장 요소적인 것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현대세계의 사목헌장이 말하듯 세계인류역사는 암흑의 세력에 저항하는 인간의 악전고투로 엮어져 있으며 이 투쟁에 말려든 인간은 선에 충실하기 위해서 끝없이 싸워야 한다. 이러한 불행을 극복하려면 교만과 무질서한 자애심 때문에 매일같이 탈선의 위험을 겪고 있는 인간의 모든 활동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써 정화해야 한다. 하느님의 도우심과 그리스도의 수난신비에 참여함으로써 자애심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대치된다. 그러므로 인간활동이 은총으로 개선되고 성화되어 마침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활동이 되도록 이 4순절의 정점인 성주간을 뜻있게 보내자. 성주간은 다만 위대하고 극적인 사건을 기념하는 성대한 예절의 나열이 아니다. 전례는 하나의 행동이다. 그리스도의 사제적 행동이나 그것은 다만 감동적이요 건설적이고 교훈적인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유효하고 그것은 우리는 실제로 또 말할 수 있다면, 육체적으로도 하느님의 생명과 일치시킨다. 그러므로 성주간에 무엇보다 타당한 고백성사로 부활을 준비하자. 부활고백성사를 聖土曜日에 받으라는 법이 없다. 모든 이가 그날 한꺼번에 밀려온다면 혼잡도 있거니와 성주간 전례를 준비하는 사제에게도 시간을 빼앗는 것이 된다. 성체제정기념일인 聖木曜日 성체를 영하기 위해서도 그전에 고백하는 것이 좋고 고백성사는 예수가 우리의 죄를 없애기 위해 당하신 고난에 대한 우리의 대답이기도 하다.
또 고백성사의 공동체적 뜻을 강조하여 본인의 죄뿐 아니라 고백소에 자기의 어려움을 느껴 주저하는 우리 형제들의 죄를 위한 기구도 권하는 바이다. 다음 예수수난날 단 한번 남은 금년 단식을 하자. 신랑이 떠나간 날이니 재(齋)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노이로제」에 가까울 정도로 너무나 몸을 아끼는 편이다. 천국에 가기 위한 편한 고속도로는 아직 마련되어 있지 않다. 작은 희생조차 지불 못하는 자는 언젠가 큰 희생을 부탁받을 때 손을 들고 말 것이다. 단식과 금욕이 거의 없어진 오늘, 성금요일 단식으로 희생하고 거기에서 절약된 돈으로 4순절 애긍을 시사하자. 그리스도 안에 우리의 형제인 오지리 가톨릭 부인회는 해마다 하루의 단식에서 절약된 돈으로 우리를 돕고 있다면 우리의 친형제가 연학하는 신하교를 돕는 것으로 알고 있는 4순절 애긍을 수난 단식으로 장만해 보자.
이것도 하나의 희생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의 손에서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얼마의 돈을 자기에게 바칠 수 있는가 하는 量에 대해서 관심이 없고 그의 눈에 중대한 것은 인간의 마음이다. 그리스도는 우리 가운데 자기 마음과 닮은 마음을 새겨주는 것이다. 즉 성부께 대한 자녀다운 마음 남에게 대한 형제같은 마음이다. 남에게 대한 사랑은 가장 위대하며, 예외없이 보다 가난한 자이다. 자기 재산의 일부분을 무슨 자선사업에 기부한 부자는 자기 의무를 다한 것 뿐이다.
이런 사람은 잊어버리게 되지만 성경에서 예수가 칭찬한 금고에 엽전을 넣는 가난한 과부와 같은 이의 모범은 언제나 살아있다. 마지막으로 성직자는 성주간의 긴 예절을 아무렇게나 빨리 해치워버리는 것 같은 인상을 신자들에게 주지 말도록 차분한 기분으로 할 것이며 예전 해설이 절대로 필요하다고 본다. 잘 해설된 전례에 참여할 때 신자들에게 훌륭한 웅변보다 더 감명을 줄 것이다. 성주간을 맞이하여 모든 신자에게 이상 몇가지에 대해서 반성을 촉구하는 바이다.